Name:

백아

Role:

Novel



AU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의 꿈>, 정현종


김기정의 GPS 신호가 콜롬비아의 어느 마을에서 끊겼다는 소식이 들린 지 일주일째, 황보석은 한겨울에 쌀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짐을 조그마한 백팩형 캐리어에 구겨 넣는다.

그의 애인은 사람 속 썩이는 데 참 재주가 있는 놈이다.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황보석은 어느 보도국 소속의 종군 기자도 아닌데, 적색경보와 흑색경보를 넘나드는 국가에 입국하는 외교법적 문제는 어떠하며, 헬멧에 PRESS 다섯 자를 새길 수도 없는 민간인이 전쟁터에 뛰어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김기정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황보석의 말을 반쯤 듣더니 그것도 모르고 다니는 줄 아냐며 도리어 화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정아. 네가 그런 데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붙잡고 빌어도 대답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말해야만 했다. 나는 어떡하라고? 자기 애인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김기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프레스 키트가 나오는 국제 프리랜서 사진작가 협회 소속이 된 지 언젠데 그런 말을 하냐는, 초점을 완전히 빗나간 대답을 들었을 때 황보석은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정작 그 주인은 자신이 화가라며, 사진보다 언제나 그림이 더 손에 익는다며 멋쩍어했지만, 김기정의 사진은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국제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어느 정부나 언론사와의 연관성도 거부한 채 자신의 홈페이지에만 사진을 비정기적으로 업로드하는데도 인터뷰 요청과 전시 초청이 종종 오고는 했다. 러브콜이 그렇게 오는데도 오직 반전 운동 관련 전시에만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참 꾸준한 놈이었다. 게다가 그가 사생활 관련 인터뷰를 일절 거부하는 이유의 반은 황보석과 그의 신분 때문이었기에, 황보석은 약간의 뿌듯함과 미안함을 담아 김기정의 손을 쥐었다. 다만, 그 애정이 김기정의 모든 행동에까지 뻗지는 않았다.

김기정이 해외에서 합동 전시, 그것도 아직 무장한 마약 갱단의 위협이 존재하는 콜롬비아에서 전시를 연다고 했을 때 황보석은 당연히 반대했다. 아니,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기정이 정말 원하는 일에 반대하는 건 황보석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전시 준비하려면 얼마나 걸려? 네가 전시 여는 도시는 안전한 건 맞고? 전시 오픈 이후로 여행할 곳 목록이랑 이동 수단 정리해 놨지? 콜롬비아 대사관 번호 외웠어?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김기정이 별의별 곳에 가며 이미 수없이 반복했던 과정인데도 묻고 또 물었다.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격전지에도 무사히 다녀왔는데 왜 유난이냐고 묻는 김기정도, 그러나, 황보석의 걱정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때 김기정이 무어라 말했다면 지금 황보석이 인천국제공항이 아니라 집에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김기정이 마약상 활동이 흔한 데다가 적색경보가 해제된 적 없는 동네에서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은, 실은 이전에 그가 다녔던 ‘취재’와 다를 바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황보석의 피가 혈관에서 흐르기를 거부했다. 생명이 차게 식은 채로 잘못됨을 사이렌처럼 울렸다. 청소년기의 본능이 살아 숨 쉰다. 행동해야 한다. 혹시 몰라서 받았던 황열 예방접종 증명서를 벽에서 떼어낸다. 그간 모아 놓은 비상금의 절반을 출금한다. 김기정과 함께 알아보았던 네이버 카페에 ‘페소 삽니다’ 글을 올리고 명동을 방문한다. 몇백만 페소를 어디에 쓰시려고요? 황보석은 최악의 상황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낸다. 그냥 그럴 일이 있어서요. 불안을 억지로 삼키며 질문이 끊기기를 기도한다. 여권과 해외 ATM 출금 가능 카드를 지갑에 넣는다. 다음 휴가 때 쓰려고 들었던 적금에서 삼백만 원이 나간다. 예, 귀국편은 예약 변경이 가능한 게 맞죠? 출국 편은 변경 예정 없습니다. 미국 ETSA 비자 발급이 오래 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출국 전날, 승인을 받는다.

그나마 이번에는 김기정이 자의로 전쟁통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게 위안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해외로 떠날 때마다 공관에 실종 신고를 하는 상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달라야 했다. 황보석은 헛웃음을 꾹 삼키면서 긴 걸음으로 공항 리무진 정류장까지의 거리를 좁힌다. 예상 도착 시각에 딱 맞추어 버스가 정차한다. 황보석은 캐리어를 탑승구 가까운 짐칸에 올려 두고, 카드를 리더기에 대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인천국제공항까지의 거리 두 시간의 일분일초가 늘어진다.

공항은 검은 패딩의 무리로 가득하다. 황보석은 그 물결을 헤치고 들어가 거대한 전광판에서 카운터를 확인한다. 출발 시각 세 시간 전,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자마자 빠르게 탑승수속을 마친다. 항공기 출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는다. 콜롬비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황보석은 탑승구 근처에서 스페인어 기초 회화책을 펼친다. 자꾸만 흐려지는 글자를 억지로 눈알에 바른다. 올라, 부에나스 따르데스, 그라시아스, 아디오스. 노 아블로 에스빠뇨르. 창밖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항공편 번호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좌석은 비교적 앞, 통로에 가까운 쪽이다.

미국까지 열세 시간의 비행은 오직 기내식과 잠으로 구성된다. 입맛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먹어야 산다. 먹어야 김기정을 찾으러 갈 수 있다. 먹어야 그 자식의 등을 힘껏 칠 수 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비빔밥을 입에 퍼 넣는 손이 하얗게 질린다. 옆자리에 환영이 앉는다. 야, 비행기에서 라면은 낭만이지. 낭만이 널 살려 주냐? 익숙한 웃음을 귀에서 털어낸다. 황보석은 기내식 쟁반을 반납하고 화장실에 잠시 들른다. 생각을 머릿속에서 배제하려 한 흔적이 눈 밑에 검게 남는다.

네가 미쳤지, 황보석, 아무리 걱정된다고 해도 김기정은 김기정인데 그걸 못 참고 콜롬비아까지 가려고 하냐? 자신을 타박한다. 이미 저질러진 일, 무의미한 말이다. 여태 김기정과 함께 산 세월이 그렇게 말한다. 황보석은 얼굴에 물을 약간 끼얹는다.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다. 애써 눈을 깜빡이다가 똑똑, 이곳은 집이 아님을 비좁은 화장실에서 깨닫는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통로의 맨 끝, 창문을 여는 사람 너머로 차갑게 밝은 아침이 보인다. 하루를 거꾸로 달려 또다시 어제의 날짜. 택싱이 끝나고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 황보석은 머리 위 짐칸에 두었던 캐리어를 꺼내어 등에 멘다. 환승하러 달려가는 길, 항공사에서 안내한 시간은 여유로웠지만 비행기는 언제나 ‘혹시 모르는’ 법이다. 그보다 공항과 훨씬 친숙한 김기정은 달리 생각할까. 그러나 황보석은 탑승구 앞 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는다. 보고타행 아비앙카 항공기는 예정 시각에 이륙한다.

엘도라도 국제공항은 영하의 한국 날씨와 적절히 대비된다. 황보석의 발걸음은 입국장에서 잠시 정류한다. 그리고 유심을 사자마자 다시 출국장으로 방향을 바꾼다. 아비앙카의 탑승권 발권 카운터에서 아라우카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편을 찾는다. 해가 저문 지 오래, 직원이 다음날 다시 오라고 알려준다. 외국인이 혼자 여행하기에는 위험하다고도 한다. 황보석은 티켓을 끊고 가겠다며 버틴다. 외교부에서 칠한 빨간색 영역을 애써 무시한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 결제까지 마치고 혹시 몰라서 예약했던 호텔의 위치를 찾는다. 모비치 부로 호텔로 향하는 셔틀에 몸을 싣고, 데스크에서 여권을 내민다. 침대가 너무 넓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화장실에서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는 기괴함을 씻어낸다. 황보석은 새벽 세 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침대에 몸을 누인다.

세 시는 어림없는 시도였다. 한 시 반에 눈을 뜬 황보석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하룻밤 숙박에 들인 돈이 뱃속 깊이 자리 잡은 걱정까지 미루어 주지는 못한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가 기도를 틀어막는다. 김기정 이 새끼야, 너 아라우카에 없기만 해 봐라. 억지로 다시 눈을 붙인다. 실패한다. 불을 켜고 스페인어책을 꺼낸다. 문장을 머릿속에 더 욱여넣고 네 시쯤 체크아웃을 완료한다. 다시, 공항으로. 아라우카행 비행기에 그를 제외한 동양인은 없다.

삼십육 도에 달하는 기온은 산티아고 페레스 퀴로즈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황보석의 팔과 머리를 강타한다. 고산 지대였던 보고타의 선선한 공기와 천지 차이인 뙤약볕이 적도 근처임을 일깨운다. 기정아, 여기 진짜 존나 덥다. 그는 들리지 않을 원망을 내뱉는다. 한국에서 더운 날이면 얼음을 가득 채운 잔에 맥주를 붓던 김기정의 표정을 상상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가 손님에게 저지른 범죄가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하던데, 칸톤으로 가는 택시는 걱정과 덕담으로 추정되는 문장을 건네기만 한다. 목이 다소 늘어난 티셔츠는 그새 땀에 젖기 시작한다.

대책 없이 도착한 지역, 숙소는 생각지도 않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데 말이다. 오랜 연인의 일에만 이렇게 원칙이 무너지고야 만다. 황보석은 구글 지도에 의지해 핑크색 침대 표시가 뜬 집을 찾는다. 집주인에게 더듬더듬 스페인어로 이틀, 사흘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집주인이 눈에 띄게 난감해한다. 노 에스 운 알베르게, 호스텔이 아닌 셋방이란다. 이 주변에 다른 곳이 없는지 간절하게 묻는다. 공항 너머 북쪽의 도시로 가야 할 텐데, 말을 늘이던 집주인이 제안을 하나 한다. 외국인을 배려하는 듯 느린 목소리다. 지금-방이-비었으니-돈을-좀-더-내면-묵게-해-주겠다.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다. 황보석은 당장 답을 내놓는다.

방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는 드디어 여행의 목적을 실행할 시간이다. 여기 한국인 있습니까, 코레아노 히어?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스페인어를 섞어 김기정의 사진과 함께 절박하게 들이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정의 고갯짓을 세려다가, 질려서 그만둔다. 콜롬비아에 여행 오는 한국인이 꽤 많다는데, 대개 보고타와 메데인, 조금 더 멀리 가면 카리브 해안 지역까지가 그 한계랬다. 그러니까, 아라우카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갈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김기정 망할 자식아,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어야겠냐? 부러 싼 티 나는 가방과 후줄근한 옷가지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 키를 줄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유한 관광객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벌써 그의 존재에 궁금증을 보이는 이들이 길가에서 대놓고 쳐다본다.

황보석은 마을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다음 행선지는……. 그는 배터리가 벌써 오십 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휴대전화를 켠다. 칸톤의 외곽에서 끊긴 GPS의 스크린샷을 불러온다. 그리고 뱃속에서 벌어지는 저항을 마주한다. 제아무리 철인이더라도 연료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마트로 걸어간다. 무엇을 사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결국은 제일 무난해 보이는 빵과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산다. 그는 가게 주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최대한 피한다. 나르코트라피칸테스 에스탄 센타다스 아뀌, 나르코 세 글자만이 귀에 머문다. 마약. 황보석은 밀려오는 불안을 공허한 미소로 덮는다.

다음 날 아침은 여전히 더위에 찌들어 있다. 막 씻고 나오는데 집주인이 부른다. 비 로 꿰 꼼프라스테 아이에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식탁으로 손짓하는 것을 보아하니 음식에 관련된 말일 테다. 황보석은 주춤주춤 다가가서 의자에 앉는다. 카레의 색을 띠는 걸쭉한 수프가 눈에 들어오다가, 고수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르자 뒷전으로 밀린다. 김기정은 비누 맛이 난다고 하던 풀이다. 황보석은 독특하기만 하지 비누 맛은 안 난다고 응수했었다. 고수를 먹을 수 있는 유전자와 없는 유전자가 다르다고 했던가. 김기정은 이 수프를 먹었을까.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들이켠 수프는 야속하게도 든든하기만 하다.

황보석은 전날 시도하지 못했던 모험을 위해 마을 뒤편으로 향한다.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우림에 발을 들인다. 땀이 차도 우비를 꿋꿋이 입는다. 아, 샛노란 포식자의 눈동자가 나무 사이에서 언뜻 비친 것만 같다. 몸이 경계 태세에 들어선다. 그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든다. 창을 든 것처럼 겨누어 보다가, 결국은 눈 앞을 가리는 잎사귀를 치우는 데 사용한다.

구글 맵과 스크린샷을 번갈아 확인하며 나아간다. 군데군데 사람의 발에 짓밟힌 자국이 보인다. 길은 아니더라도 흔적은 흔적. 누군가, 아니 누군가‘들’이 여기 왔었다는 증명. 황보석은 스크린샷을 확대한다. 분명히 요 근처에서 신호 수신이 끊겼을 텐데. 이미 숲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상태, 퇴로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걸은 결과다. 그새 야생 동물이 물어 갔나? 휴대전화에 정신을 팔다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돌멩이처럼 딱딱한 것에 발이 걸린다. 무심코 아래를 본다.

새까만 것이 밟힌다.

사각형이다.

익숙한 케이스다.

세상에 단 두 개만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에 금이 가 있다.

황보석의 심장에도 금이 간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냥, 그냥 여기서 떨어뜨렸을 거야. 아직, 살아 있을 거야. 황보석은 점멸하는 시야를 어찌하지 못한다. 파손된 액정의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정신을 꿰뚫는다. 피가 흐르기 전에 김기정의 휴대전화, 이제 더는 쓰지 못할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고이 모셔 둔다. 뇌는 아니야, 세 글자만을 반복해 외친다. 아니야. 아니야. 안 죽었어. 살아 있어. 잃어버린 걸 거야, 멀쩡할 거야. 희망을 쥐어짜더라도 놓지는 않는다. 그래야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숲의 안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 황보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되짚는다. 되짚다가, 왼쪽에 주저앉은 인영을 본다. 흠칫 놀라 물러선다. 그리고 인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 전까지 굳는다. 족히 여든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다. 외교부에서 내주었던 공문의 글자가 그의 눈앞을 어른거린다. 함부로 타인을 도우려 하지 말 것. 위장한 채 접근해서 강도질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주의할 것. 하지만 한눈에도 불안정한 노인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지. 상충하는 의견이 황보석의 뇌 안에서 대치한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린다. 돌리려고 한다. 이 거대한 망연함을 프로세싱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염병……! 황보석은 끝내 열 발짝도 채 걷지 않아 걸음을 되짚는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뚜껑을 반 정도 채워 노인에게 건넨다. 그가 물을 급하게 들이키자, 손짓발짓으로 천천히, 천천히를 강조한다. 황보석은 물병의 내용물을 반 넘게 마신 노인에게 다시 말을 건다. 집이 어디입니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몸짓은 만국 공통이다. 노인의 떨리는 손가락이 저쪽으로 가자며 우림의 안쪽으로 길을 안내한다. 황보석은 노인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른다. 몇십 미터도 가지 못해 그의 걸음이 무너진다. 황보석은 말없이 그를 부축한다. 피부에 달라붙는 습기를 털어낸다. 수 킬로미터처럼 느껴지는 수백 미터를 걸어가자, 웬 집이 한 채 나타난다. 소란이 일더니 노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달려 나온다. 황보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재잘거리던 아이가 그의 손을 이끈다. 한시라도 빨리 김기정을 찾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의 발걸음은 이미 아이의 뒤를 군말 없이 따르고 있다.

노인의 집은 데이터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곳이다. 대화의 수단이 빼앗긴 셈, 소통은 몸짓과 영어-비슷한-스페인어로 이루어진다. 황보석이 그나마 알아들은 단어는 노인에게 어떠한 병이 있다는 것뿐이다. 치매였을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그라시아스가 수십 개 오간다. 아이들이 황보석의 곁에서 맴돈다. 그러다가 하나가 팔에 매달린다. 거부하는 반응이 없으니 나머지 아이들도 달려든다. 그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이가 말리려고 하지만, 황보석은 괜찮다고 손짓한다. 대신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낸다. 비네 부스칸토 아 에스타 페르소나. 표지를 넘겨 하고 싶은 말을 찾는다. 김기정의 사진을 들어 보인다. 알구나 베즈 아스 비스토 아 에스타 페르소나? 이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제발, 제발……. 노인의 가족원들이 하나씩 차례로 고개를 젓는다. 또 다른 미로의 끝. 그런데, 그때 집에 들어오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뜬다. 시, 시, 에 비스토 안테스! 그의 손짓이 명확히 김기정을 가리킨다. 무어라 더 말이 이어지지만 들리지 않는다. 절망의 끝자락에 동아줄이 내려온다.

남자와 지도의 힘을 빌려 길을 찾는다. 우림의 안쪽으로 더 깊이 구불구불 걷는다. 한 시간이 넘는 침묵 끝에 허름한 창고 하나가 눈에 띈다. 그 앞을 기관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지키고 섰다. 외부인의 접근에 그것들이 자동으로 겨누어진다. 황보석의 옆에서 남자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 나간다.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스페인어 사이로 코레아노, 한 단어만이 귀에 선명하다. 무척이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이드-남자와 그의 발언을 경청하던 이가 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베네수엘라 접경지대에는 밀입국자가 많으므로 특별히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한국 여권은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덜컥 겁이 난다. 설마, 나를 속이고 이곳에 데려온 건가? 황보석은 잠시 망각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한다. 그의 출국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출입국 기록이 남아서 실종 신고가 들어가더라도 데이터는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무장한 여자가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미고? 황보석은 목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죽은 줄 알았던 희망이 다시 펄떡인다. 여자가 손을 까딱인다. 황보석을 안으로 들이라는 신호다. 위협적으로 들이대어지던 총구가 땅으로 떨어진다. 여자의 허리춤에 달린 무전기에서 잡음과 스페인어가 쏟아진다.

여자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창고 안에는 방이 여러 개 있다. 그것들을 전부 지나쳐 복도 끝, 왼쪽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남자가 보인다. 한쪽 다리가 하얀색에 뒤덮인 채다. 그런 관찰 사항은, 남자가 눈을 뜨자마자 황보석의 뇌에서 튕겨 나간다.

뭐야, 황보석? 네가 왜 여기, 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김기정, 살아 있는 김기정, 생명이 깃든 김기정, 생과 숨과 사랑을 말하는 김기정, 온몸이 잘게 떨리는 김기정,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를 든 김기정, 손목에 무언가 쓸린 자국이 난 김기정, 안긴 채 등을 두드리는 김기정, 두드리다 말고 억세게 옷을 쥐는 김기정. 김기정의 이미지가 수십 개 겹쳤다가 흐려진다. 야, 석아, 나 팔 아파. 김기정의 왼팔을 그의 몸에 고정한 붕대가 가슴에 닿는다. 이 사람들이 나를 구해 줬어, 이어지는 설명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아 그의 입을 황보석 자신의 입으로 막는다. 눈가에서 드디어 안도감이 흐른다. 기정, 기정아. 기정아, 김기정,

생, 삶, 나의——



AU일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


그렇다면 생은 항상 사랑 뒤에 온다

<사랑의 꿈>, 정현종


김기정의 GPS 신호가 콜롬비아의 어느 마을에서 끊겼다는 소식이 들린 지 일주일째, 황보석은 한겨울에 쌀 수 있는 가장 가벼운 짐을 조그마한 백팩형 캐리어에 구겨 넣는다.

그의 애인은 사람 속 썩이는 데 참 재주가 있는 놈이다. 몇 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황보석은 어느 보도국 소속의 종군 기자도 아닌데, 적색경보와 흑색경보를 넘나드는 국가에 입국하는 외교법적 문제는 어떠하며, 헬멧에 PRESS 다섯 자를 새길 수도 없는 민간인이 전쟁터에 뛰어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아느냐며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김기정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황보석의 말을 반쯤 듣더니 그것도 모르고 다니는 줄 아냐며 도리어 화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정아. 네가 그런 데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붙잡고 빌어도 대답이 바뀌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말해야만 했다. 나는 어떡하라고? 자기 애인의 타들어가는 속도 모르고 김기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프레스 키트가 나오는 국제 프리랜서 사진작가 협회 소속이 된 지 언젠데 그런 말을 하냐는, 초점을 완전히 빗나간 대답을 들었을 때 황보석은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정작 그 주인은 자신이 화가라며, 사진보다 언제나 그림이 더 손에 익는다며 멋쩍어했지만, 김기정의 사진은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국제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어느 정부나 언론사와의 연관성도 거부한 채 자신의 홈페이지에만 사진을 비정기적으로 업로드하는데도 인터뷰 요청과 전시 초청이 종종 오고는 했다. 러브콜이 그렇게 오는데도 오직 반전 운동 관련 전시에만 긍정적인 답변을 보내는 모습을 보면 참 꾸준한 놈이었다. 게다가 그가 사생활 관련 인터뷰를 일절 거부하는 이유의 반은 황보석과 그의 신분 때문이었기에, 황보석은 약간의 뿌듯함과 미안함을 담아 김기정의 손을 쥐었다. 다만, 그 애정이 김기정의 모든 행동에까지 뻗지는 않았다.

김기정이 해외에서 합동 전시, 그것도 아직 무장한 마약 갱단의 위협이 존재하는 콜롬비아에서 전시를 연다고 했을 때 황보석은 당연히 반대했다. 아니, 반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기정이 정말 원하는 일에 반대하는 건 황보석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전시 준비하려면 얼마나 걸려? 네가 전시 여는 도시는 안전한 건 맞고? 전시 오픈 이후로 여행할 곳 목록이랑 이동 수단 정리해 놨지? 콜롬비아 대사관 번호 외웠어?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김기정이 별의별 곳에 가며 이미 수없이 반복했던 과정인데도 묻고 또 물었다.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격전지에도 무사히 다녀왔는데 왜 유난이냐고 묻는 김기정도, 그러나, 황보석의 걱정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때 김기정이 무어라 말했다면 지금 황보석이 인천국제공항이 아니라 집에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무너진다.

그래서 김기정이 마약상 활동이 흔한 데다가 적색경보가 해제된 적 없는 동네에서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은, 실은 이전에 그가 다녔던 ‘취재’와 다를 바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황보석의 피가 혈관에서 흐르기를 거부했다. 생명이 차게 식은 채로 잘못됨을 사이렌처럼 울렸다. 청소년기의 본능이 살아 숨 쉰다. 행동해야 한다. 혹시 몰라서 받았던 황열 예방접종 증명서를 벽에서 떼어낸다. 그간 모아 놓은 비상금의 절반을 출금한다. 김기정과 함께 알아보았던 네이버 카페에 ‘페소 삽니다’ 글을 올리고 명동을 방문한다. 몇백만 페소를 어디에 쓰시려고요? 황보석은 최악의 상황을 애써 머릿속에서 밀어낸다. 그냥 그럴 일이 있어서요. 불안을 억지로 삼키며 질문이 끊기기를 기도한다. 여권과 해외 ATM 출금 가능 카드를 지갑에 넣는다. 다음 휴가 때 쓰려고 들었던 적금에서 삼백만 원이 나간다. 예, 귀국편은 예약 변경이 가능한 게 맞죠? 출국 편은 변경 예정 없습니다. 미국 ETSA 비자 발급이 오래 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출국 전날, 승인을 받는다.

그나마 이번에는 김기정이 자의로 전쟁통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게 위안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해외로 떠날 때마다 공관에 실종 신고를 하는 상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달라야 했다. 황보석은 헛웃음을 꾹 삼키면서 긴 걸음으로 공항 리무진 정류장까지의 거리를 좁힌다. 예상 도착 시각에 딱 맞추어 버스가 정차한다. 황보석은 캐리어를 탑승구 가까운 짐칸에 올려 두고, 카드를 리더기에 대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인천국제공항까지의 거리 두 시간의 일분일초가 늘어진다.

공항은 검은 패딩의 무리로 가득하다. 황보석은 그 물결을 헤치고 들어가 거대한 전광판에서 카운터를 확인한다. 출발 시각 세 시간 전, 체크인 카운터가 열리자마자 빠르게 탑승수속을 마친다. 항공기 출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는다. 콜롬비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고, 황보석은 탑승구 근처에서 스페인어 기초 회화책을 펼친다. 자꾸만 흐려지는 글자를 억지로 눈알에 바른다. 올라, 부에나스 따르데스, 그라시아스, 아디오스. 노 아블로 에스빠뇨르. 창밖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쳐다보다가,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항공편 번호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좌석은 비교적 앞, 통로에 가까운 쪽이다.

미국까지 열세 시간의 비행은 오직 기내식과 잠으로 구성된다. 입맛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먹어야 산다. 먹어야 김기정을 찾으러 갈 수 있다. 먹어야 그 자식의 등을 힘껏 칠 수 있다.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비빔밥을 입에 퍼 넣는 손이 하얗게 질린다. 옆자리에 환영이 앉는다. 야, 비행기에서 라면은 낭만이지. 낭만이 널 살려 주냐? 익숙한 웃음을 귀에서 털어낸다. 황보석은 기내식 쟁반을 반납하고 화장실에 잠시 들른다. 생각을 머릿속에서 배제하려 한 흔적이 눈 밑에 검게 남는다.

네가 미쳤지, 황보석, 아무리 걱정된다고 해도 김기정은 김기정인데 그걸 못 참고 콜롬비아까지 가려고 하냐? 자신을 타박한다. 이미 저질러진 일, 무의미한 말이다. 여태 김기정과 함께 산 세월이 그렇게 말한다. 황보석은 얼굴에 물을 약간 끼얹는다.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낸다. 애써 눈을 깜빡이다가 똑똑, 이곳은 집이 아님을 비좁은 화장실에서 깨닫는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통로의 맨 끝, 창문을 여는 사람 너머로 차갑게 밝은 아침이 보인다. 하루를 거꾸로 달려 또다시 어제의 날짜. 택싱이 끝나고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 황보석은 머리 위 짐칸에 두었던 캐리어를 꺼내어 등에 멘다. 환승하러 달려가는 길, 항공사에서 안내한 시간은 여유로웠지만 비행기는 언제나 ‘혹시 모르는’ 법이다. 그보다 공항과 훨씬 친숙한 김기정은 달리 생각할까. 그러나 황보석은 탑승구 앞 구역에 도착하기까지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는다. 보고타행 아비앙카 항공기는 예정 시각에 이륙한다.

엘도라도 국제공항은 영하의 한국 날씨와 적절히 대비된다. 황보석의 발걸음은 입국장에서 잠시 정류한다. 그리고 유심을 사자마자 다시 출국장으로 방향을 바꾼다. 아비앙카의 탑승권 발권 카운터에서 아라우카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편을 찾는다. 해가 저문 지 오래, 직원이 다음날 다시 오라고 알려준다. 외국인이 혼자 여행하기에는 위험하다고도 한다. 황보석은 티켓을 끊고 가겠다며 버틴다. 외교부에서 칠한 빨간색 영역을 애써 무시한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좌석 결제까지 마치고 혹시 몰라서 예약했던 호텔의 위치를 찾는다. 모비치 부로 호텔로 향하는 셔틀에 몸을 싣고, 데스크에서 여권을 내민다. 침대가 너무 넓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 화장실에서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는 기괴함을 씻어낸다. 황보석은 새벽 세 시에 알람을 맞춰 놓고 침대에 몸을 누인다.

세 시는 어림없는 시도였다. 한 시 반에 눈을 뜬 황보석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눈을 깜박인다. 하룻밤 숙박에 들인 돈이 뱃속 깊이 자리 잡은 걱정까지 미루어 주지는 못한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가 기도를 틀어막는다. 김기정 이 새끼야, 너 아라우카에 없기만 해 봐라. 억지로 다시 눈을 붙인다. 실패한다. 불을 켜고 스페인어책을 꺼낸다. 문장을 머릿속에 더 욱여넣고 네 시쯤 체크아웃을 완료한다. 다시, 공항으로. 아라우카행 비행기에 그를 제외한 동양인은 없다.

삼십육 도에 달하는 기온은 산티아고 페레스 퀴로즈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황보석의 팔과 머리를 강타한다. 고산 지대였던 보고타의 선선한 공기와 천지 차이인 뙤약볕이 적도 근처임을 일깨운다. 기정아, 여기 진짜 존나 덥다. 그는 들리지 않을 원망을 내뱉는다. 한국에서 더운 날이면 얼음을 가득 채운 잔에 맥주를 붓던 김기정의 표정을 상상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가 손님에게 저지른 범죄가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하던데, 칸톤으로 가는 택시는 걱정과 덕담으로 추정되는 문장을 건네기만 한다. 목이 다소 늘어난 티셔츠는 그새 땀에 젖기 시작한다.

대책 없이 도착한 지역, 숙소는 생각지도 않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비상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데 말이다. 오랜 연인의 일에만 이렇게 원칙이 무너지고야 만다. 황보석은 구글 지도에 의지해 핑크색 침대 표시가 뜬 집을 찾는다. 집주인에게 더듬더듬 스페인어로 이틀, 사흘 머물 곳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집주인이 눈에 띄게 난감해한다. 노 에스 운 알베르게, 호스텔이 아닌 셋방이란다. 이 주변에 다른 곳이 없는지 간절하게 묻는다. 공항 너머 북쪽의 도시로 가야 할 텐데, 말을 늘이던 집주인이 제안을 하나 한다. 외국인을 배려하는 듯 느린 목소리다. 지금-방이-비었으니-돈을-좀-더-내면-묵게-해-주겠다. 거절할 이유 따위는 없다. 황보석은 당장 답을 내놓는다.

방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는 드디어 여행의 목적을 실행할 시간이다. 여기 한국인 있습니까, 코레아노 히어? 짧은 영어와 더 짧은 스페인어를 섞어 김기정의 사진과 함께 절박하게 들이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정의 고갯짓을 세려다가, 질려서 그만둔다. 콜롬비아에 여행 오는 한국인이 꽤 많다는데, 대개 보고타와 메데인, 조금 더 멀리 가면 카리브 해안 지역까지가 그 한계랬다. 그러니까, 아라우카에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갈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김기정 망할 자식아,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어야겠냐? 부러 싼 티 나는 가방과 후줄근한 옷가지를 가져온 이유가 있다. 키를 줄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부유한 관광객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벌써 그의 존재에 궁금증을 보이는 이들이 길가에서 대놓고 쳐다본다.

황보석은 마을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 행선지는, 다음 행선지는……. 그는 배터리가 벌써 오십 퍼센트 이하로 떨어진 휴대전화를 켠다. 칸톤의 외곽에서 끊긴 GPS의 스크린샷을 불러온다. 그리고 뱃속에서 벌어지는 저항을 마주한다. 제아무리 철인이더라도 연료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마트로 걸어간다. 무엇을 사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결국은 제일 무난해 보이는 빵과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산다. 그는 가게 주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최대한 피한다. 나르코트라피칸테스 에스탄 센타다스 아뀌, 나르코 세 글자만이 귀에 머문다. 마약. 황보석은 밀려오는 불안을 공허한 미소로 덮는다.

다음 날 아침은 여전히 더위에 찌들어 있다. 막 씻고 나오는데 집주인이 부른다. 비 로 꿰 꼼프라스테 아이에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식탁으로 손짓하는 것을 보아하니 음식에 관련된 말일 테다. 황보석은 주춤주춤 다가가서 의자에 앉는다. 카레의 색을 띠는 걸쭉한 수프가 눈에 들어오다가, 고수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르자 뒷전으로 밀린다. 김기정은 비누 맛이 난다고 하던 풀이다. 황보석은 독특하기만 하지 비누 맛은 안 난다고 응수했었다. 고수를 먹을 수 있는 유전자와 없는 유전자가 다르다고 했던가. 김기정은 이 수프를 먹었을까. 그라시아스를 연발하며 들이켠 수프는 야속하게도 든든하기만 하다.

황보석은 전날 시도하지 못했던 모험을 위해 마을 뒤편으로 향한다.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우림에 발을 들인다. 땀이 차도 우비를 꿋꿋이 입는다. 아, 샛노란 포식자의 눈동자가 나무 사이에서 언뜻 비친 것만 같다. 몸이 경계 태세에 들어선다. 그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하나 집어 든다. 창을 든 것처럼 겨누어 보다가, 결국은 눈 앞을 가리는 잎사귀를 치우는 데 사용한다.

구글 맵과 스크린샷을 번갈아 확인하며 나아간다. 군데군데 사람의 발에 짓밟힌 자국이 보인다. 길은 아니더라도 흔적은 흔적. 누군가, 아니 누군가‘들’이 여기 왔었다는 증명. 황보석은 스크린샷을 확대한다. 분명히 요 근처에서 신호 수신이 끊겼을 텐데. 이미 숲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상태, 퇴로를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걸은 결과다. 그새 야생 동물이 물어 갔나? 휴대전화에 정신을 팔다 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돌멩이처럼 딱딱한 것에 발이 걸린다. 무심코 아래를 본다.

새까만 것이 밟힌다.

사각형이다.

익숙한 케이스다.

세상에 단 두 개만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에 금이 가 있다.

황보석의 심장에도 금이 간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냥, 그냥 여기서 떨어뜨렸을 거야. 아직, 살아 있을 거야. 황보석은 점멸하는 시야를 어찌하지 못한다. 파손된 액정의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정신을 꿰뚫는다. 피가 흐르기 전에 김기정의 휴대전화, 이제 더는 쓰지 못할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고이 모셔 둔다. 뇌는 아니야, 세 글자만을 반복해 외친다. 아니야. 아니야. 안 죽었어. 살아 있어. 잃어버린 걸 거야, 멀쩡할 거야. 희망을 쥐어짜더라도 놓지는 않는다. 그래야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숲의 안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 황보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되짚는다. 되짚다가, 왼쪽에 주저앉은 인영을 본다. 흠칫 놀라 물러선다. 그리고 인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기 전까지 굳는다. 족히 여든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다. 외교부에서 내주었던 공문의 글자가 그의 눈앞을 어른거린다. 함부로 타인을 도우려 하지 말 것. 위장한 채 접근해서 강도질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주의할 것. 하지만 한눈에도 불안정한 노인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지. 상충하는 의견이 황보석의 뇌 안에서 대치한다. 그는 애써 고개를 돌린다. 돌리려고 한다. 이 거대한 망연함을 프로세싱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염병……! 황보석은 끝내 열 발짝도 채 걷지 않아 걸음을 되짚는다.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뚜껑을 반 정도 채워 노인에게 건넨다. 그가 물을 급하게 들이키자, 손짓발짓으로 천천히, 천천히를 강조한다. 황보석은 물병의 내용물을 반 넘게 마신 노인에게 다시 말을 건다. 집이 어디입니까.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몸짓은 만국 공통이다. 노인의 떨리는 손가락이 저쪽으로 가자며 우림의 안쪽으로 길을 안내한다. 황보석은 노인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른다. 몇십 미터도 가지 못해 그의 걸음이 무너진다. 황보석은 말없이 그를 부축한다. 피부에 달라붙는 습기를 털어낸다. 수 킬로미터처럼 느껴지는 수백 미터를 걸어가자, 웬 집이 한 채 나타난다. 소란이 일더니 노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달려 나온다. 황보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로 재잘거리던 아이가 그의 손을 이끈다. 한시라도 빨리 김기정을 찾아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의 발걸음은 이미 아이의 뒤를 군말 없이 따르고 있다.

노인의 집은 데이터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곳이다. 대화의 수단이 빼앗긴 셈, 소통은 몸짓과 영어-비슷한-스페인어로 이루어진다. 황보석이 그나마 알아들은 단어는 노인에게 어떠한 병이 있다는 것뿐이다. 치매였을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그라시아스가 수십 개 오간다. 아이들이 황보석의 곁에서 맴돈다. 그러다가 하나가 팔에 매달린다. 거부하는 반응이 없으니 나머지 아이들도 달려든다. 그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이가 말리려고 하지만, 황보석은 괜찮다고 손짓한다. 대신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낸다. 비네 부스칸토 아 에스타 페르소나. 표지를 넘겨 하고 싶은 말을 찾는다. 김기정의 사진을 들어 보인다. 알구나 베즈 아스 비스토 아 에스타 페르소나? 이 사람을 본 적 있습니까? 제발, 제발……. 노인의 가족원들이 하나씩 차례로 고개를 젓는다. 또 다른 미로의 끝. 그런데, 그때 집에 들어오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뜬다. 시, 시, 에 비스토 안테스! 그의 손짓이 명확히 김기정을 가리킨다. 무어라 더 말이 이어지지만 들리지 않는다. 절망의 끝자락에 동아줄이 내려온다.

남자와 지도의 힘을 빌려 길을 찾는다. 우림의 안쪽으로 더 깊이 구불구불 걷는다. 한 시간이 넘는 침묵 끝에 허름한 창고 하나가 눈에 띈다. 그 앞을 기관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지키고 섰다. 외부인의 접근에 그것들이 자동으로 겨누어진다. 황보석의 옆에서 남자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 나간다.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스페인어 사이로 코레아노, 한 단어만이 귀에 선명하다. 무척이나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이드-남자와 그의 발언을 경청하던 이가 서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눈다. 베네수엘라 접경지대에는 밀입국자가 많으므로 특별히 주의하기를 바랍니다. 한국 여권은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덜컥 겁이 난다. 설마, 나를 속이고 이곳에 데려온 건가? 황보석은 잠시 망각하고 있던 진실을 마주한다. 그의 출국 사실을 아는 이는 없다. 출입국 기록이 남아서 실종 신고가 들어가더라도 데이터는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무장한 여자가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아미고? 황보석은 목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죽은 줄 알았던 희망이 다시 펄떡인다. 여자가 손을 까딱인다. 황보석을 안으로 들이라는 신호다. 위협적으로 들이대어지던 총구가 땅으로 떨어진다. 여자의 허리춤에 달린 무전기에서 잡음과 스페인어가 쏟아진다.

여자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창고 안에는 방이 여러 개 있다. 그것들을 전부 지나쳐 복도 끝, 왼쪽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은 남자가 보인다. 한쪽 다리가 하얀색에 뒤덮인 채다. 그런 관찰 사항은, 남자가 눈을 뜨자마자 황보석의 뇌에서 튕겨 나간다.

뭐야, 황보석? 네가 왜 여기, 야!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김기정, 살아 있는 김기정, 생명이 깃든 김기정, 생과 숨과 사랑을 말하는 김기정, 온몸이 잘게 떨리는 김기정,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를 든 김기정, 손목에 무언가 쓸린 자국이 난 김기정, 안긴 채 등을 두드리는 김기정, 두드리다 말고 억세게 옷을 쥐는 김기정. 김기정의 이미지가 수십 개 겹쳤다가 흐려진다. 야, 석아, 나 팔 아파. 김기정의 왼팔을 그의 몸에 고정한 붕대가 가슴에 닿는다. 이 사람들이 나를 구해 줬어, 이어지는 설명 따위를 듣고 싶지 않아 그의 입을 황보석 자신의 입으로 막는다. 눈가에서 드디어 안도감이 흐른다. 기정, 기정아. 기정아, 김기정,

생, 삶, 나의——

NAVER WEBTOON GARBAGE TIME

Unofficial Works Collaboration


Shipping; Hwangbo Seok × Kim Gijeong

(C) 2024 RUNNING HEART ALL RIGHT RESERVED.

NAVER WEBTOON GARBAGE TIME

Unofficial Works Collaboration

Shipping;

Hwangbo Seok × Kim Gijeong

(C) 2024 RUNNING HEART

ALL RIGHT RESERVED.

NAVER WEBTOON GARBAGE TIME

Unofficial Works Collaboration

Shipping; Hwangbo Seok × Kim Gijeong

(C) 2024 RUNNING HEART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