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사망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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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익명

Role:

Novel



황보석은 지금 김기정의 시체 옆에 앉아있다. 


아니, 그가 애써 고개를 돌린 채 보려 애쓰지 않고 있는 저 시체가 김기정인지 아닌지는 사실 황보석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뒤에서는 현지인들이 힌디어로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시체의 처리 방법과 경찰을 부르니 마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관광객 같아 보이는 황보석을 끌어내는 것도 대화의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석은 모든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치부하기로 하며 눈을 감았다. 넘실거리는 강물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강둑을 철썩거리며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는 해가 뜨는지, 뻘건 빛이 눈두덩에 내려앉았다.

황보석은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위생학적으로 꽤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라나시의 강가에는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 있다….’ 라며 괜한 위험을 경고하는, 인터넷에서 본 괴담 한 구절이 생각났다. 갑자기 바지 밑단 드러난 살이 간지러워졌다. 다리를 타고 이상한 벌레가 꾸물꾸물 기어들어와 콱 뇌까지 침투해버릴 것만 같았다. 석의 감은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미간 역시 쪼그라들었지만, 석은 끝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 말을 떠올리며 석은 조금씩 진정하려 애썼다. 

석은 기정을 보았다. 눈을 꼭 감아서 까만 시야가 점차 머릿속의 바라나시 강둑으로 변해가고, 제 옆에는 여명이 얼굴에 얹어진 기정이 앉아있었다. 아, 서 있었다. 상상은 너무 어려웠다. 석의 눈동자는 자꾸만 꿈틀거렸다. 다시 시작해보자, 기정이 서 있었다. 기정은 온갖 색의 천 쪼가리로 기워진 알리바바 바지를 입고, 웃기게 생긴 지구가 그려진 프린팅의 티셔츠를 걸친 채, 갠지스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떠내려가는 시체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웩, 여기서 석의 상상이 잠시 멈췄다. 그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다 불타지 못한 채 떠내려가는 시체라니…! 아, 다시 집중하자. 다시 돌아본 기정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자연스러움을 본 것처럼, 삶과 생과 죽음과 신체의 한순간이 전혀 역겹지 않은 것처럼, 가난한 자들이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겨우겨우 반쯤이라도 태워서 아팠던 이승의 삶을 조금이나마 정화해주기 위해 애쓴, 그런 사람들의 사랑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석은 기정과 헤어지고 나서 다음날도 출근했다. 이유는 없었다, 평일이니까. 직장인이라면 이별 즈음은 출근 전에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던 것인지, 평소보다 늦게 서부간선도로에 진입했고, 석의 계산에 따르자면 7시 35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막히는 구간인 금천 IC를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길에서 20분이나 시간을 소요하고서는 운동장의 흙먼지를 탈탈 굴려대는 차에서 그대로 빠져나와 교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은 출근했는데, 24시간이 채 안 되어서 헤어진 전 남자친구분은 비슷한 시간대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건, 석쌤 피곤해 보인다며 점심시간 이후 박카스를 건네준 옆자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황보석은 분노가 치밀었다. 남은 수업은 없었고, 교무실에 한가로이 앉아서 타닥타닥 서류를 만들며 업무를 보고 있었지만, 뱃속에서는 쓰게 위액이 넘어갔다. 헤어짐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몇 주 전에는 이런 지지부진함이 괴로워 빨리 결단이 났으면 했었던 사람도 황보석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쳐온 이별은 괴로웠고, 마지막에 은은하게 쌍욕 섞인 눈빛으로 잘살라는 말도 한마디 없이 짜증 내며 가버린 전 남자친구가 자유롭게 사람 사는 날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속이 쓰렸었다. 


‘헤어진 이유를 모르겠다.’ 석은 3개월이 지난 후, 가까스로 찾아온 황금연휴에 겨우겨우 만난 대학 동기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여자애들 속 알려고 해봤자 어려워.’ 이 동기는 기정을 여자로 알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정의 속은 언제나 알기 어려웠다. 푹 쉬어지는 한숨에 동기는 파채를 덜어주며 격려했다. 속 알맹이가 비어있는 형식적인 말이었다. 슬슬 일어나고 싶은 건지, 자꾸만 어깨너머로 멍해지는 친구의 눈빛을 모른 척하면서 석은 메뉴판을 뒤적였다. 아직 사람 사는 사랑했다. 석은 헤어지기 싫었다. 기정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석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둘은 인제 그만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은근히 결혼을 재촉하며, 마찬가지로 기정을 여자로 알고 있는 석의 가족 때문인지 아니면 기정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서 또 떠나고 싶은 것 때문인지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었겠지만. 

하지만 석은 기정에게 그때처럼 다시 한번 기대했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걸을까 말까 하는 이 길을 대번에 걷어차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기정이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둘의 연애도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나가 주기를 기대했었다. 석의 부모님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방랑벽이 있다면 그저 한 번 멀리 떠났다 오기를 바랐다. 사실 그는 기정에게 어느 정도의 무모함을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황보석은 김기정이 석을 길러 낸 황보종배씨와 손경희씨가 키가 멀대만한 자식이 신랑이 둘인 결혼식을 여는 걸 바라만 보게 만들어 버리라고, 그런데 그 신랑 중 하나가 자식이 고등학교 때까지 같이 살부비며 공놀이하던 친구 중 하나인 걸 깨닫게 해버리라고, 독산동에 있는 중학교에 근무 중인 체육교사가 돌리는 청첩장을 통해서 그 선생님, 남자랑 결혼한대, 해버리게 하라고 말이다. 물론 석은 기정이 진짜 저렇게 행동했다면 쓰러졌을 테고, 기정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고, 둘은 싸웠고 그리고 끝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헤어졌다. 


왁자지껄한 황톳빛 고깃집의 벽을 멍하게 바라보던 친구와의 술자리가 파한 후, 석은 비틀거리며 도어락을 열고 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푸우 푸우 숨을 내쉬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석은 느끼고 있었다. 초와 분과 시는 야속하게 시계의 바늘을 돌렸고, 달력이 팔랑팔랑 넘어간 지 오래였다. 밀어 넣듯 먹은 삼겹살이 자갈처럼 속을 쳐댔다. 푹푹 꺼지는 기분을 느끼며 석은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예처럼 잠옷으로 갈아입고 아침에 널부러놓고 간 옷을 대충 서랍에 쑤셔 넣었다. 의미 없이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문득 쓰잘데기 없는 담배 냄새와 절간 향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이별을 실감한 석은, 휴대폰을 엎어놓고 충전기에 꽂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가 잠에서 퍼뜩 깨게 된 건 그로부터 5시간이 지나서였다. 비몽사몽 받은 전화에서는 떠듬떠듬 울음소리가 섞인 배경음에 섞인 기정의 아버지, 김영인씨의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아, 혹시 최근에 기정이랑 연락했니…?’ 피곤했고, 졸음이 쏟아졌고, 그보다 더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석은 느꼈다. 석은 정말 피곤했고, 아직 미묘하게 남은 알콜의 막타로 잠을 자고 싶었지만, 눈이 떠졌고 이내 그는 차를 몰고 네비를 찍고 출발시켰다. 


늦은 새벽에 갑자기 본가에 들이닥친 기정이 아무런 말도 않고 곤히 자던 김영인씨와 맥주 한 캔과 함께 TV 예능을 보던 그의 어머니를 깨웠다. 눈가에는 눈물이 흐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기정을 보며 둘은 가타부타 그를 안아주려 했지만, 기정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미소만 지어대며 제 큰 가방에 옷을 집어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기정의 방을 뒤로한 채, 그는 잠시 여행을 다녀올 거라고 했다고 한다. 원체 그런 식으로 훌쩍 떠나는 일이 많았던 터라, 김영인씨는 다시 들어가 잠을 청했고, 기정의 어머니는 찰랑찰랑 남은 맥주를 비우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정은 렌터카 앱을 켜서 렌터카를 빌리고, 공항에 가서 출국한다며 심사대 앞에서 사진을 보내고서는 떠난 지 4일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도 없고 연락을 받지도 않는다고, 역시나 피곤함에 절어있는 갠지스 강 숙취에 절어있는 황보석에게 설명했다. 황보석은 이상하게 어렸을 때보다 힘겨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차마 더 이상 황보석 자신도 김기정과 연락을 하지도, 보지도 않을 사이라는 걸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기정은 거대한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모님에게 둘의 사이를 말했었다. 석은 온종일 빙글빙글 제 집을 돌면서 기정의 선택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불행한 생각만 했었다. 마침내 기정에게 전화가 왔을 때, 석은 기다린 티가 나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목을 가다듬고 받았다. 기정은 평탄한 목소리로 뭐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석은 주어를 두지 않고 상황에 대해 질문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지.’ 그 뒤로 기정이 주말에 자빠져 자거나 술을 퍼먹거나 할 때에, 혹은 아주 가끔 김영인씨에게 꽤 괜찮은 과일세트가 들어올 때마다 석에게 연락이 왔었다. 석은 그 순간마다 자주 기정과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묘하고 몽글거리는 감정과 함께. 


석은 제 차 조수석에 김영인을 태우고서는 영사관으로 차를 몰았다. 김영인의 손은 땀에 절었는지, 그는 초조하게 제 손을 자꾸만 청바지에 닦았다. 석은 꽉 막히는 도로에서 톡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김영인은 경찰에는 이미 신고를 했는데, 거절당했다든지, 앞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너무 빨갛다든지 등의 의미 없는 말만 자꾸 늘어놓았다. 석은 도저히 그의 앞에서 이미 자신과 기정이 헤어졌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기정이 온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영인과 그의 아내가 아파트 복도등이 꺼져가는 어둠 속으로 문을 닫고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 석은 차에 올라탔다. 어설픈 위로와 희망의 말로 배웅하고 난 뒤에야 현실이 몰려왔다. 기정이 실종된 건 맞지만, 연휴는 끝이 났고, 곧 석은 출근해야 했다. 이제서야 제집으로 향하면 아무리 밟아도 새벽 1시는 되어야 도착할 것이다. 석은 안경을 벗어 컵홀더에 대충 접어 넣고서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잠을 자고 싶었다. 비슷하게 졸음이 쏟아져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한테 캔커피 세 캔을 결제하고 난 뒤, 석은 커피를 속에 들이부으면서 차를 출발했다. 

필로티에 차를 박을까 조심하며 주차하고 난 뒤, 내려서 잠깐 스트레칭을 한 후 시간을 보니 벌써 다음날 새벽 1시 20분이었다. 앞으로 5시간이 지나면 황보석은 다시 출근하러 나가야 했다. 기껏해야 서너 시간 정도만 잘 수 있었다. 석은 졸음이 잔뜩 묻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빌라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먼지 속에 방치된,

요즘 누가 우편을 받겠는가?

빌라주민은 전부 자취하는 1인 가구라 쿠x이나 마x컬리의 열렬한 사용자였기에, 집 앞으로 배송되는 상품에 익숙했다.

그러나 피곤을 가중시키는 LED 하얀색 가로등이 유달리 비추면서

그날 따라 갑자기 더더욱

열어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게 하는

일렬의 네모난 우체통, 그 중 석의 집인 701호 우체통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날은 갑자기 그러고 싶어서 석은 열어보았다. 


뽀얗게 쌓인 가루가 훅, 하고 날렸고 여닫이식으로 되어있는 한순간이 경첩 사이에는 뭉쳐 희끄무레해진 먼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내부에 손을 넣어 더듬기로 한 것도 평소의 황보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유독 그러고 싶어서, 석은 손을 넣어 더듬었고, 딱딱한 종이가 그의 손끝에 걸렸다. 전단지의 날카롭고 미끄러지는 비닐 코팅이 아닌, 어딘가 생경하고 살아있는 종이가 나왔다. 그의 손바닥만한 종이는 탁한 흰색을 띠고 있었고, 코끼리가 먹다 만 것처럼 섬유질이 눈에 보였다. 거칠었고, 요즘 흔히 말하는 ‘감성’ 느낌이 물씬 나는 종이의 정체는…,

이국적인 강가와 불타는듯한 노을로 가득한 하늘을 찍은 사진이 담긴 엽서였다. 

석은 자신에게 엽서를 보낼 사람을 빠르게 머리로 추려보았다. 

3개월 전에 헤어지고, 지금 행불자 상태가 된, 미친 전남친을 제외하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교 후배 상언이? 재혁이? 하지만 둘은 지금 열심히 프로농구 코트(벤치에 있는 시간이 더 길지만)를 누비고 있느라 외국에 갈 시간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석은 앞면의 사진에서 일본이나 유럽도 아닌 곳의 자취를 느끼고는 휙, 엽서를 뒤집었다. 엽서 뒷면에는 휘갈겨 쓴 한국어와 또박또박 정자지만, 기성품의 공장에서 찍어낸 알파벳이 보였다. 석은 그 글씨를 알았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알고 지낸 세월만 장정 합쳐 이십 년이 넘고, 입을 맞댄 시간, 그러니까 석이 종종 그와의 결혼을 생각한 시간만 십 년이 넘어가는 기정의 글씨였는데….


석은 빌라의 자동문 앞에 걸터앉아 컴컴한 새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정의 글씨로 휘갈겨 쓴 엽서에는, ‘오지 마!’ 라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그가 이 엽서를 보낸 것이 분명한 주소가 알파벳으로 적혀있었다. 네x버에 영문 주소를 검색했더니, 이상한 웹사이트들만 줄줄이 나오자, 황보석은 내수용 검색엔진이라며 투덜거리다가 구글에 주소를 입력했다. 그러자 지도 앱으로 다이렉트되는 한 게스트하우스의 정보가 떴다. 위치는 그렇게 다들 자아를 찾아서 간다는, 안전필수 황보석이 단 한 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은, 인도였다. 이내 황보석은 엽서 앞 사진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유튜브로 본 그곳이었다. 유튜버가 호객꾼을 ‘참교육’하고, 비위생적이라며 길거리 음식을 경악하는 걸 컨텐츠로 삼는, 그렇지만 해가 뜨고 지는 빛이 강에 드리우는 걸 보며 낭만에 젖을 수밖에 없는 갠지스 강의 도시였다. 석은 그들의 영상을 화면 너머로 보면서 자신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니까, 자의로 말이다. 

하지만 타의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의로 가지 않기로 한 곳이지만, 기정이 실종된 지금, 그의 글씨체로 온, 그것도 ‘오지 마!’라고 적혀있는 수상한 엽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체통의 상태를 보아 할 때, 엽서는 최소 한 달 전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기정은 본인의 실종 이전에 이 엽서를 보낸 게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취자의 고성방가를 묵묵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건 딱 질색이었다. 그가 예측할 수 없는 것들. 세상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두렵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놨던 이상한 떨림과… 이별 등등. 하지만 하지만 석은 기정과의 연애를 통해서 세상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숨이 턱 차게 많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엽서도, 그중에 하나이다. 아니, 어쩌면 기정이 남기는 마지막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기적’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석은 잘하지도 못하는 상상을 하려 노력했다. 비행기를, 지금, 그가, 경유하는…, 아버지한테 설명을, 어떻게 취직한, 아직 정규교사도 아닌데, 돌아와서 뭐라 해야 할지, 교감의 히스테리, 자동차의 할부금과, 보험, 연금, 노후, 재취업, 그리고……. 황보석은 다시 한번 생각에 빠져들었다. 손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수월하게 상상해 낼 수 있었다. 사랑,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삐죽 솟은 머리, 스치듯 나던 살 내음, 입술, 코, 눈, 약간 낮은 목소리, 달리던 모습과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과 뛰라고 소리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과, 튕기는 공소리의, 김기정. 


황보석은 인천공항 주차장에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따뜻한 나라에서 돌아오는 모양인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옷을 입은 일가족이 차에 타다 말고 그를 흠칫 바라보았다. 석은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차를 돌려 학교로 향한다면, 밤은 샌 꼴이 되겠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레도, 그리고 그리고, 계속되는 나날도, 문제없이 무탈하게 평범하게 일생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그,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서 여즉 없애버리지 못한, 고등학교 때에도 버리지 못해 끝내 하나의 흔적으로 남은 충동적이고 낭만으로 가득하고 가끔 자유롭게 여겨지는 김기정의 흔적이 석으로 하여금 발을 주차장이 아닌 출국장으로 향하게 했다. 

집에 처박혀있었던 티가 풀풀 나는 커다란 등산 가방을 카운터에서 부치면서 황보석은 정말로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싶다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어두컴컴하지만 아늑한 침실과 포근한 냄새와 적당히 습하고 적당히 건조한 공기에 기분 좋은 이불, 그리고 무엇보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석이 팔을 둘러 꾸욱 안을 수 있는 적당히 단단한 몸과 백구십오에 가까운 석의 키에도 제 코끝에 바스락거릴 수 있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와 함께 눈을 감고 아주 오래 깊고 달게 푹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황보석은 소원과 달리 단잠을 자지 못하고 자주 깨어났다. 좁아터진 저가항공의 이코노미좌석은 그의 다리 관절을 비트는 것처럼 압박했다. 창밖에는 떠오른 해가 눈이 아플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옆좌석에서는 액션영화라도 보는지 쨍그랑하는 소리가 에어팟을 뚫고 나왔다. 그는 도저히 감기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면서 경유지인 홍콩국제공항에 내렸다. 석은 내리자마자 경유 환승 표지판을 따라갔다.


천천히 걸어가며 황보석은 직선으로 이어진 구간에서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기정을 상상하려 애썼다. 그러자 검은 공간이 밝아지면서 차차 그가 걸어가던 공항의 경유 환승 구간이 그려졌다. 광둥어와 영어, 중국어와 때때로는 한국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가 기억하던 평소의 모습보다는 차분히 내려앉아 있지만, 여전히 버석해 보이는 뾰족한 검은 머리칼과 정수리, 김영인이 보여준 커다란 고릴라 키링이 달린 가방, 연신 훌쩍거리는 코, 비행기에서 내내 운 것인지 눈물의 소금기가 말라붙은 뺨의 기정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며 재빠르게 걷다가, 쏟아지는 공항의 햇빛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입술을 꾹 물고서, 기정이, 석이 제일 무서워했던, ‘곧 사고 칠 것 같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결심하고서는 단단한 발걸음으로 쑥쑥 걸어가는 모습을 석은 볼 수 있었다. 양쪽 가방끈을 야무지게 쥐어매고, 김기정은……, 기정은…, 기정이는….

황보석은 눈을 떴다. 기정이 걷던 통로를 다 걸어나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제 머릿속의 기정처럼, 창문이 온통 통유리인 홍콩공항의 밝은 모습에 절망하고, 게이트 옆 딱딱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딱딱하지만 가로막히지 않은 의자에서야 겨우 다리의 관절을 펼 수 있었다. 석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공항의 와이파이를 잡았다. 연신 울리는 카톡 알림음 사이로 보이는 메시지의 내용을 애써 무시하고 김영인씨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었다. 그는 기정의 티켓 내역을 통해서 기정이 홍콩을 거쳐 인도로 향했다고 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석은 생각했다. 한국에서 떠나는 가장 이른 경로이기도 하니까, 둘의 경로가 겹치고 있었다. 석은 김영인에게 온 메시지에 답장으로 ‘저 지금 기정이 찾으러 가고 있어요.’라고 보내고서는 와이파이를 껐다. 아마 그에게서도 곧 무수하게 많은 카톡 폭탄을 받게 될 테지만, 그리고 학교쌤들과 가족들에게 온 엄청난 양의 연락도 더더욱 쏟아질 테지만, 아무렴 어쩔 수 없었다. 석은 약간의 씁쓸하고 불안한 후회를 느끼면서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전화 수신 거부까지 걸어놓고 나니, 이제는 울릴 일이 없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둘러본 기내는 이전 비행기보다 한층 더 요란스러워져 있었고, 석은 이제 더 좁아 팔꿈치까지 비틀리기 시작한 좌석 너비에 수면을 포기하고 뜬 눈으로 멍하니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가끔가다 드넓은 바다와 오밀조밀 어디인지 모를 육지가 보이며 비행기는 날아갔고, 그는 정말로 잠에 들고 싶었다.

비행기가 착륙알림음을 내며 우당탕탕 거칠게 착륙했다. 아주 짧은 잠에 빠졌던 황보석은 뒤틀린 관절이 지르는 비명에 깨어났다. 그런 그를 맞이하는 건 몇 시간째 다운받은 쇼츠모음집 영상을 보는 옆자리 사람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컴퓨터 효과음이었다. 그는 한층 더워진 공기를 느끼며 인도 뉴델리의 간디 국제공항 입국수속을 밟았다. 얇은 긴팔티의 소매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입국장의 직원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 높은 그의 얼굴과 여권을 대조하기 위해서 석에게 계속해서 ‘다운, 다운’이라고 말했고, 석은 낑낑거리면서 무릎을 굽혀 얼굴을 창구에 들이밀었다. 공항은 드넓었고, 사람은 더욱 많았다. 귓가에서 힌디어와 영어와 여러 언어가 섞여 들렸다. 석은 공항 내에서 환전과 유심을 파는 점포 한 곳에서 유심을 사서 갈아 끼웠다.

석은 공항에서 철도를 타고 뉴델리역으로 나갔다. 바야흐로 그의 전 애인이 가고 싶어했고, 이 나라에서 사라졌고, 그는 갈 생각도 계획도 없었던 인도였다. 요란한 말소리에 경적소리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묘한 향신료의 냄새가 한국보다 더운 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역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냥 사람. 남들보다 시야가 두 뼘쯤 높은 석은 사람들의 연이은 행진에 밀리지 않게 기둥 근처로 가서 휴대폰을 켰다. 석은 여기서 김기정이 어떻게 인파를 뚫고 갔을지 상상해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지갑과 여권이 아직 바지 주머니에 있다는 걸 생각하자, 굳이 눈을 감지 않기로 했다. 그는 몰려오는 인파와 쏟아지는 피로와 누적된 좁은 좌석 관절 뒤틀림증으로 바로 기정의 엽서에 적힌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도시로 향하기보다는 하루 묵고 가기를 선택했다. 물론 홍콩에서 경유하면서 찾아본, 인도 철도여행 유튜브와 족히 한나절은 넘게 걸리는 무지막지한 이동거리 때문이기도 했다. 석은 역 근처에서 손을 휘저으며 손님을 끄는 릭샤 하나를 잡아타고 미리 예약해둔, 그래도 돈을 꽤나 쓴 괜찮은 호텔로 향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가득한 거리였다. 석은 주머니 속 지갑과 여권을 손으로 꽉 쥔 채 잔뜩 굳어서 릭샤에 실려갔다. 귓가에서 기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뭐 그리 긴장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석은 가끔 그런 기정의 여유가 부러웠다. 김기정의 여유는 석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자신이 화내고 계산하고 계획할 때마다 기정은 막지르고 놓아줄 줄 알고 즉흥적이었다. 김기정과의 연애에서 황보석은 사랑과 스트레스는 동일하면서도 별개임을 알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그를 보면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기정과의 연애기간 내내 석이 괴롭지 않았냐 하면 아주 아니지만, 우정의 기간과 성인 되고 나서 사귀기 시작해 근 십 년이 넘었었던 연애 기간을 생각해보면 황보석 본인은 그 스트레스를 주는 기정과의 여행을 꽤나 좋아했었다. 석이 할 수 없는 걸, 가지 않는 길을, 먹지 않는 걸, 보지 않는 걸, 하고 가고 먹고 보고 사랑했으니까.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자, 피곤과 허기가 몰려왔다. 릭샤 기사와의 흥정에 팔자에도 없는 실랑이를 거듭하느라 이미 지친 상태였다. 분명 교직 공부할 때, 토익이나 오픽이니 땄는데도 막상 영어로 말하려니 다 부서진 상태로만 말할 수 있었다. 체크인 과정에서도 살짝 버벅이면서 피곤은 극치를 달했다. 석은 룸서비스로 주문하려 했으나 메뉴판을 펼쳐보자 바로 접고 내려가, 로비에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에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 해가 지고 있어, 햇빛이 하늘에 남아있으니 조금의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거 스스로에게 설득했다. 석은 로비로 내려가, 길거리를 향해 뚫린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대충 빵과 수프, 파스타, 그리고 거듭 강조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나서 석은 한 손으로 제 휴대폰을 꽉 쥐고 두 눈을 감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내 다시 한번 기정의 모습을 상상했다.

검은 시야는 어느새 정신없는 뉴델리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기정은 석과 달리 바로 기차를 타기로 결정했는지 쏟아지는 인파를 조심조심 헤치고 나가서 티켓을 끊어왔다. 석은 홍콩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표를 끊은 자신보다 배는 비싸게 구매하는 기정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플랫폼 아래로 내려간 기정은 초록색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렸다. 역사 안에 돌아다니는 커다란 개를 보기도 했고, 천장에 매달려서 철도 경찰들이 막대기를 휙휙 휘두르며 내쫓는 원숭이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기도 했다. 열차가 올 기미가 없자, 그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 바깥에서 노점상들이 음식과 잡화를 팔고 있었다. 기정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세모난 튀긴 만두 같은 음식을 사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베어 물자 김이 나는 사모사 튀김은, 석에게도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내 기정은 더운지 옷 목부근을 잡고 펄럭거리더니, 옆 노점상에서 티셔츠 한 장과 바지 하나를 사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서는, 여전히 열차가 올 기미가 없는 플랫폼을 뒤로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만 한 차이 통을 들고 다니는 소년에게 차이 한 컵을 사 마시고, 드디어 온 열차에 올라탔다. 푸른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린 기차에서 기정은 덜컹거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황보석은 음식이 나왔다는 말에 눈을 떴다. 밖은 해가 지면서 남긴 빛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석이 강조한 대로 얼음을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면서 그는, 아마 기정이 산 사모사, 차이, 티셔츠, 바지값을 전부 합쳐도 자신이 낸 릭샤 값보다 덜 나왔을 거로 생각했다. 음식은 그럭저럭 맛있었다. 석은 비싸 보이는 버터를 빵에 발라먹으면서 기정이 사 먹은 튀김을 생각했다. 절대, 먹지 말아야지. 튀김의 기름이 검은색이었다는걸 기억해내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값을 치르고 나오면서 황보석은 호텔 프런트에서 미리 예매한 기차표를 프린트했다. 명실상부 아이티의 나라인 인도인데도 인터넷이 미치게 느려서 석은 몇 번이고 다시 로그인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딩아이콘을 봐야만 했다. 피로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다. 겨우 뽑은 기차표 종이를 반 접어서 가지고 객실로 올라가면서, 황보석은 오늘만큼은 기필코 깊은 잠을 자리라 다짐했다. 다행히도 호텔 객실 이불은 적당히 부드랍고 포근했으며, 에어컨에 달린 제습 기능 덕에 덥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지 못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쌍꺼풀진 눈이 번뜩번뜩 뜨였다. 잠이 들려 하면, 기정의 모습이 그려졌다. 김기정은 에어컨도 나오지 않고 선풍기만 돌아가는, 덜컹이고 시끄러운 인도 여객열차의 슬리핑 베드 칸에서 야무지게 벙커 침대를 내려서 쿨쿨 자고 있었다.

결국 황보석은 거의 자지 못했다. 푹신하고 좋은 침대에 적당한 온도에 완벽하게 고요하지 않지만 조용한 바깥까지 최적의 수면조건이었지만 눈만 감으면 어디론가 향하는 김기정, 아니면 온갖 다양한 사인으로 죽어있는 김기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호텔 측에서 무료로 방을 업그레이드해준 탓에 백구십오가 혼자 자도 가로로 너무 넓은 침대는 눈을 뜨기만 하면 외로움만 증폭시켰다. 그와 한 침대에서 대충 얽혀서 자던 감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지도 헤어진 지 세달, 헤어지기 전 권태기 두달해서 어언 육 개월이 넘었음에도, 석은 팔과 팔이 얽혀 공기가 닿는, 맨살은 차갑고 이불 아래 허리는 따뜻한 그 체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외롭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석은 충혈된 눈을 부비며 새벽의 쿰쿰한 공기를 마셨다. 호텔에서 불러주는 무진장 비싼 택시를 타고(석은 이 돈으로 커피가 몇 잔일지 생각했다, 아니 차이가 몇 잔일지) 뉴델리역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의 열차는 기정의 열차처럼 연착되지 않았는지 플랫폼에 서 있었다. 기차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줄을 서서 타는 수많은 사람을 지나, 석은 높은 등급의 한가한 칸에 탔다. 그의 침대칸에는 에어컨도 나왔고, 웰컴드링크로 추정되는 작은 물병도 놓여있었다. 아래층 침대에는 먼저 온 나이 지긋한 흰 수염의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석은 이곳에서 차라리 푹 자는 계획을 세웠다. 가방을 옷장에 쑤셔 박고 나서,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눈웃음을 짓고 나서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석의 수면 계획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너무 키가 컸다. 바다 위로 낚여 올려진 물고기처럼 다리를 한없이 옆으로 웅크려야지 침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쿡쿡 쑤시는 무릎을 접어서 끙끙대던 석은, 결국 꾸벅꾸벅 졸기, 라는 선택지를 택하고는 애매하게 머리를 벽이 기대고 누웠다. 목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걸 무시하면서 눈을 감은 그는, 정말 잠에 들려 했으나 다시 검은 시야에 기정의 모습이 쓱쓱 그려지기 시작했다. 쾌적한 석의 좌석과 다르게 사람으로 꽉 찬 슬리핑 베드 칸에서 기정은 잠을 깼다.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난 후, 턱을 괴고 천천히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충전이 될까 의심스러운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 휴대폰을 충전시키고는, 기정은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시끌벅적한 그 칸에서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석의 귀에만 들려왔다. 석은, 기정이 보던 폰화면이 그와 석과의 카톡 대화창인 것을 알아냈다.

눈을 떴다. 황보석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눈물이 쉬이 나오는 타입이 아닌지라, 그저 울적한 마음만 가지고 덜컹덜컹하며 달려가는 기차에 몸이 천천히 흔들릴 뿐이었다. 결국 석은 또다시 자는 걸 포기한 채로, 구부렸던 긴 다리를 침대 난간에 걸터놓고 기정이 보던 것처럼, 둘의 대화창을 한참 노려보았다. 아랫층 노인은 잠이 든 것인지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앞칸에서는 음식이라도 나눠 먹는지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향신료냄새가 났다. 누군가 화장실을 쓰는지, 갑자기 지린내도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석은 토하고 싶어졌다.

바라나시역에 도착하자 출발할 때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노을로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열두 시간이 족히 넘는 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차내식으로 나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석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줄줄이 서 있는 릭샤들 사이에 기정이 열심히 먹던 세모난 사모사 튀김 노점이 있었다. 기름은 미친 듯이 거뭇거뭇하고, 뜰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석은 잠시 주저하다가, 정말 충동적으로 다가가서 한 봉투를 샀다. 막 튀겨서 꺼내준 사모사는 뜨거웠고, 후후 불어도 입술이 데일 것만 같았다. 석은 조심조심 베어 물면서, 이번에는 좀 더 나은 솜씨로 릭샤 기사와 흥정을 한 후, 기정에게서 온 정체 모를 엽서에 적힌 주소를 불러주었다. 기사는 으쓱하더니 릭샤를 출발시켰다. 석은 철판으로 된 표지판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릭샤에 앉아 사모사를 하나하나 먹어치웠다. 속이 끓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거니 애써 무시했다.

릭샤는 덜덜거리면서 갠지스 강가로 달렸다. 힌두교 인들의 성스러운 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곳곳에서 금색 천으로 덮인 시신들이 화려한 가마에 실려 화장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해는 강을 마치 불꽃처럼 벌겋게 물들였고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는 마치 강에서 나오는 것처럼 강을 뒤덮였다. 오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석과 같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차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유골이 흩뿌려진 물을 몸에 끼얹고 기도하는 이가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종소리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삶과 죽음과 사랑이 한눈에 보였다. 석은 지나가는 모든 황금천 아래에 김기정이 누워있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우려 노력했다. 강물에 불꽃이 꺼져가듯이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기정아,

기정아. 김기정 이 미친 새끼야, 어딨는 거야, 대체…. 석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무릎이 릭샤 바깥으로 조금씩 튀어나왔다. 검은 시야가 천천히 타오르는 불꽃의 갠지스 강으로 바뀌었다. 기정은 석과 마찬가지로 덜덜거리는 릭샤를 타고 강가를 지나갔다.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목 빼놓고 바라보았다. 기정의 얼굴에 노을과 어둠과 그사이 오묘한 푸른색과 보라색이 내려앉았다.

석은 기정의 엽서에 적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는 한참 동안 주소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제 지갑과 여권을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꽉 쥐고는 지도 앱으로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가정집처럼 보였지만, 옥상에 삐죽삐죽 올라가 있는 의자들과 걸려있는 꼬마전구들이 여기가 게스트하우스가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석은 조금 낮은 문에 머리를 쑤욱 숙이며 들어갔다. 기정이 여기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설렁설렁 걸어나왔다. 석은 청년에게 기정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지만, 청년은 영어를 통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석에게 그저 원 퍼슨? 이라고만 물었다. 결국, 그는 파x고를 켜서 번역해서 보여주고, 옆에 있는 종이에 냅다 김기정의 이름을 적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이십 분이 넘게 손짓 발짓으로 실랑이하다가, 청년은 석에게 투모로우, 라며 말했다. 사장이 내일 온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석은,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서는 청년에게 한 손가락을 펴 보이며 숙박의 뜻을 전달했다. 청년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일인실은 비좁고, 나프탈렌 냄새로 가득했지만, 창문 너머로 갠지스 강의 강가가 훤히 보였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서, 달빛이 창백하게 묻은 강을 바라보며, 석은 기정이 왜 이곳에 왔을지 알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황보석이 김기정을 이해한 순간이.


호텔보다 훨씬 딱딱한 침대에서는 괜히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석은 자려고 해도 이불 밖으로 발목이 자꾸만 빠져나왔다. 한국을 떠나온지 3일이 넘은 지금, 그는 오랜만에 카톡을 켰다. 미어터질 것 같은 메시지들에 교장에게 온 메시지도 있었다. 하다 하다 못해, 취직할 때, 적어냈던 비상 연락처의 부모님께 연락이 간 모양인지, 석의 부모님은 석에게 어디냐는 메시지와, 실종신고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실종된 기정이를 찾으러 와서 황보석 저 자신이 실종 신고될 위기에 처했다는 이 상황이 모순되게 우스웠다. 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가면 재취업이 가능할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뾰족한 답도 수도 떠오르지 않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부모님께는 ‘저 잘 있어요, 학교는 그만둘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 하나 보내고, 김영인씨한테서 온 내려앉아 있지만 들어갔다. 그는, 대사관에서 한국인 실종자를 수색 중이라고 했다고 말해주었고, 마지막으로는 석에게 ‘석아, 너 회사는 어떻게 한 거니?’ 라고 물었다. 석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카톡을 끄고 벌렁 드러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피로한 몸은 수면을 원했으나, 뇌는 쉽사리 휴식에 들어가지 않았다. 애써 눈을 감았다. 머리는 또다시 검은 시야에서 기정을 보여주었다. 기정은 살포시 흩날리는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진 채 강가에 서 있었다. 석이 본 푸른 달빛이 그를 물들였다. 밤에도 쉬지 않는 화장터의 연기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뒤섞여 뿌연 시야 너머로 기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석과 눈이 마주치고서는, 석은 눈을 떴다.

새벽이 밝아져 왔고, 해가 떠올랐다. 석은 또다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김기정과 눈이 마주친다. 그 눈을 석은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9년을 사귀었다면, 그의 부모님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텐데, 설사 내쫓겨도 석은 집도 있고 직장도 있는 어른이었는데, 뭐가 그리 무서웠을까. 그게 무엇이고 어떤 시선이길래 그는 기정과 멀어졌고 기정과 헤어졌을까. 그는 사랑한 것이 맞을까. 황보석은 헤어진 지 몇 달이 넘는 전 애인을 찾아서 직장도 무단으로 결근하고 비행기로만 열 시간을 날아왔다. 이건, 사랑이 아닌가. 아니라면 그는 대체 얼마나 겁쟁이인가.


황보석은 하늘이 해가 뜰 준비를 하며 푸르게 물들자, 억지로 자려던 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석은 나가고 싶어졌다. 강가를 향해 걷고 싶어졌다. 힌두어로 경전을 외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여명이 뜨기도 직전이었다. 석은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어제 보았던 청년이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이를 만드는지 우유 끓는 냄새가 났다. 석은 새가 지저귀는 바깥으로 나갔다. 몇몇 부지런한 릭샤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터는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강가에는 물을 끼얹고 기도하는 이들이 즐비했고, 그런 독실한 신자들을 위해 차이 한 잔 팔 요량으로 나와 있는 차이 장수도 커다란 차이 통을 매고 앉아있었다. 강가 근처의 콘크리트 계단에 군데군데 놓여있는 금색 향로들에서 아직 불씨가 남은 향들이 타고 있었다. 문득 기시감을 느낀 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자 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검은 시야가 갑자기 조금 전까지 보던 길로 바뀌었다. 석이 걷던 길을 똑같이 따라 걷는 기정이 보였다. 석이 지나온 길을 지나, 석이 보았던 부지런한 릭샤 기사들의 릭샤를 피해 길을 건너, 꺼지지 않고 연기를 내뿜는 화장터를 지나, 기도하는 신자들과 어김없이 차이를 팔고 있는 차이 장수를 지나, 불씨가 아슬하게 남은 향로를 지나서 강가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계단까지. 물이 계속해서 부딪혀 초록색 이끼가 낀 그곳까지, 기정은 걸어갔다. 석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소란스레 모여있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

시체 주위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황보석은 인터넷에서 본인도 위생, 같은 글을 전부 무시하며 제 옆에 있는 강둑 계단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언뜻 고개를 돌리면서 본 시체는 사람들이 망자의 예를 지켜주려는 것인지 얼굴에는 흰 천을 덮고 있어서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땅바닥에 풀썩 쓰러진 몸뚱아리가 입고 있던 티셔츠는 그가 계속해서 보던 기묘한 데자뷔 속 기정이 입은 것과 똑같았다. 김기정이 뉴델리역에서 사모사를 사 먹고 남은 돈으로 노점에서 산 그 티셔츠와 그 바지였다. 옅은 상아색에 삐뚤빼뚤한 그림체의 지구가 그려진 티셔츠와 온갖 천을 덧대서 입은 알리바바 바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석이 수면에 들지 못했던, 인도에서의 모든 시간 내내 정말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그려지던 기정이 내내 입고 있던 옷이었는데. 숨을 몰아쉬는 황보석의 얼굴에 붉은 여명이 내려앉았다. 키도 장대하고 누가 봐도 관광객인 그가 한쪽 구석에서 몸을 비틀거리며 앉아있으니, 걱정이 된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어라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석에게는 전부 들리지 않았다. 감은 석의 시야에는 여명이 내려앉은 기정이 갠지스 강 너머를 바라보다, 그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그는 그토록 많은 죽음이 떠내려가는 강을 평온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물에 입이 잠겨가면서,

누군가의 손에 목이 졸리면서,

목에 칼이 닿으면서,

갑자기 구토하며,

울면서 스스로의 팔뚝을 잡고,

주르륵 쓰러지면서

죽어버렸다. 황보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김기정이, 김기정이 자꾸만 죽고 있었다. 아니, 저기 쓰러진 시체가 김기정이었다. 기정이 죽었다, 이게, 그럼 나는 이제 기정이를, 아저씨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 나는 이제 기정이를 만날 수 없는 건가, 살아있는 김기정을, 담배냄새가 섞인 살내음과, 굳은살이 박힌 집게손가락, 웃으면 찌푸려지는 콧대, 노래 부를 때 삑사리가 나는 목소리, 농구를 하던, 미술을 하는, 대학을 겨우 졸업한, 나와 함께 살았던, 입 맞췄던, 사랑, 사랑했던, 그리고, 그리고……,

 

“야!”


누군가의 손길이 눈을 감고 반쯤 계단에 누워있는 황보석의 어깨를 휙 잡아챈다. 석은 오랜만에 들린 한국어에 눈을 뜬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담배냄새. 왁스를 챙겨오지 않았는지 착 가라앉은 머리의 김기정이 황보석 눈앞에 나타났다.


“야! 너 뭐해!”


기정이 살아있었다. 지구가 그려진 티셔츠와 알리바바 바지가 아닌, 오색찬란 타이다이티셔츠와 코끼리가 잔뜩 그려진 후들후들한 바지를 입은 채로, 손에는 어디서 먹다 남은 차이 한 잔을 들고, 인도 바라나시에서 살아있는 채로 황보석과 만났다. 경찰들이 오면서 사람들을 해산시키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와중에 말이다. 황보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너…,”


석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균형감각을 잡지 못해서 무릎을 한번 찧고는 손으로 겨우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김기정은 어어, 소리를 내며 그를 부축해 주려 했으나, 이내 황보석에게 멱살이 단단히 잡혔다.


“미친 새끼야, 너 이 씨발, 아!!! 김기정!!!”


기정이 슬쩍 웃었다. 기정의 내려간 눈매에 해가 떠오르며 나는 붉은빛이 잔뜩 물들었다. 살아있는 김기정이었다. 석은 피로도 잊은 채 꽥 소리 질렀다.


“웃어?”

“아, 미안.”

“너 당장 아저씨랑 아줌마한테 연락해, 너 죽은 줄 알았다고 나는.”

“아, 보석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뭐? 뭐가 중요한데 그럼. 너 실종신고 됐다고!”

“아니, 야, 왜 왔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엽서도 보냈는데!”


석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자기가 먼저 실종되어서 부모님이 우시면서 달려오는 불효 따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뭔, 무슨…, 아 그래, 그 엽서,”

“석아, 잘 들어. 이제는 다시 절대, 절대 오지 마. 나를 찾고 싶겠지만,”

“어? 야!”

“나를 찾지 마!”


기정은 들고 있던 차이 잔을 내팽개친 채, 석의 멱살 잡은 두 손을 힘껏 떼어냈다. 기정의 코끼리 바지에 갈색 차이가 잔뜩 묻었다. 이윽고 기정은 두 손이 떼어져 균형감각을 잃은 석을 힘껏 뒤로 밀었다. 석은 어디를 급히 잡을 틈도 없이 넘어지면서 풍덩, 하고 갠지스 강에 빠지고 말았다. 뒤통수에 뜨뜻미지근한 강물이 닿으면서 코와 입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석은 갠지스 강의 위생상태와 외국인이 들어갔다가 감염되었다는 괴담과, 그가 본 수많은 화장터의 재가 흘러들어 가는 곳과, 그리고 씨발 무엇보다 죽은 줄 알았던 김기정이 살아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죽게 생겼다는 것과, 범인이 바로 제가 살려내려고 그렇게 찾아다니던, 직장도 잃고 통장 잔고의 반절을 날리면서 찾아낸 전 남자친구라는 것까지 생각하면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더니,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힘으로 눈꺼풀이 감겼다, 석은 딱!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인도의 성스러운 갠지스 강도, 사람이 파도처럼 쓸려오는 뉴델리도, 사방이 통유리인 홍콩공항도 아닌,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그의 오피스텔 침대 위였다.


황보석은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더듬어보니, 흘린 식은땀 정도만 이마에 남아있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어보니, 날짜는 4일 전, 그러니까 석이 술에 취해 엎어져 자다가 김영인씨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깨어나던 그날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김영인씨로부터 전화나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같이 술을 마신 동기한테서나 ‘괜찮냐?’라는 메시지 한 통뿐이었다. 석은 던져둔 티셔츠를 대충 주워입고 일 층에 있는 우체통을 열어보았다. 먼지와 누군가 넣고 간 헬스 전단지만 가득할 뿐, 엽서는 없었다. 석의 반 토막 난 통장 잔고도 그대로 복구되었고, 어떠한 카드도 인도행 홍콩경유 비행기를 결제한 흔적이 없었다. 마지막 결제는 석이 어젯밤 집에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맥주 4캔 만 이천 원을 산 것이었다. 베란다를 뒤져 겨우 꺼내 갔던 커다란 가방도 원래 있던 곳에 먼지와 함께 잘 있었으며, 길가다가 진흙이 잔뜩 묻었던 운동화 역시 깨끗했다. 무엇보다, 팔로우를 끊어버린 기정의 인스타그램에 몰래 들어가 보니, 당장 오늘 날짜로 태국에 있다는 사진과 글이 올라와 있었다. 석은 꿈도 이렇게 생생할 수 없다면서 하루 남은 귀한 휴일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냉수샤워를 했지만, 마지막에 확인한 김기정의 인스타그램 속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하루 종일 기분이 불쾌한 상태로 휴일을 보내고는 결국 다음날에 금천 IC를 7시 40분이나 되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똑같은 나날을 황보석은 보냈고, 어떤 날은 가끔 기정의 인스타를 차단했고 어떤 날은 가끔 들여다보았으며, 가끔 분노했고, 가끔 울적해지는 2달이 지나고 나서, 또 엎드려 자던 그에게 김영인씨의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기정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이고 자취를 감췄다고 했고, 석은 또다시 우체통에서 석양이 드리워진 발리 바닷가가 담겨있고, 기정의 필체로 ‘꺼져!’라고 쓰여 있는 엽서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무모한 선택 때문에 발리로 날아갔다. 이전과 똑같이 계속해서 잠을 자지 못했고, 기정을 보았고, 겨우겨우 도착한 엽서 속 주소에서 상상 속 기정과 똑같은 옷을 입은 시체가 파도에 밀려오는 걸 보았으며, 다시금 기정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김기정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보석아, 이번에는 제발 오지 마!”


황보석은 다시 밀쳐져 푸른 에메랄드빛 발리 바다에 처박혔고, 퍼뜩 눈 떠보니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황보석은 계속해서 베니스의 운하에, 오사카의 도톤보리 강에, 프놈펜의 메콩 강에, 몽골의 홉스굴 호수에, 하와이의 남태평양의 물에 흠뻑 빠졌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김기정은 매번 그를 밀쳐 물에 빠뜨렸고, 황보석은 매번 기정의 환상을 보고, 시체를 보고, 어거지로 꺾여서 비행기에 실려 다녔다. 결과는 항상 기정이 석을 뒤로 밀치면서 석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이 결말을 알면서도 석은 매번 엽서를 받고서는 기정을 향해 출발했고, 기정 역시 매번 엽서를 보내는 것이었다. 석은 이 모든 여정 내내 잠을 푹 잔 적이 없었다. 아, 황보석은 정말로 잠이 들고 싶었다. 돌고 돌아서 기정에게 온 엽서가 익숙한 강가이던 어느 날, 석이 다시 홍콩을 거쳐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 사람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뉴델리역을 이제는 익숙하게 헤쳐가던 날, 릭샤 기사와의 흥정에 가뿐히 성공하던 날,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와 죽음, 강물과 기도하는 이들과 삶, 그리고 또 다른 기정의 옷을 입은 시체와 강가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도시에 도착하던 날, 석은 마침내 뒤로 나자빠져 갠지스 강의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무게중심을 옮겨 기정을 어깨로 밀어뜨리면 앞으로 넘어질 수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기정이, 문짝만 한 황보석과 콘크리트 바닥 사이에서 눈을 찌푸리며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석은 기정이 도망갈 수 없게 그의 목덜미를 잡고 기정의 위로 올라탔다.


“아, 황보석, 존나 아파….”

“이거 뭐냐, 빨리 설명해라.”


기정은 손을 들어 석의 볼에 가져다 댔다. 황보석은 제 손으로 탁 치며 말했다.


“뭐하냐?”

“야, 너 뭔 얼굴에 나뭇잎을 묻히고 다녀.”


석은 볼을 벅벅 문질렀다. 얇은 갈색 나뭇잎 쪼가리가 손끝에 만져졌다. 기정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말했다.


“석아, 사람들이 다 보는데?”


기정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모여든 사람들과 경찰관들이 둘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석은 재빨리 기정의 멱살을 붙들어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다음에, 옆으로 비켜 기정을 앉혔다. 경찰이 보지 못하게 기정이 그들을 등지는 방향으로 일으킨 건 덤이었다. 석은 거칠게 멱살을 잡고 기정을 흔들었다.


“빨리 설명하라고, 김기정.”

“석아,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엽서를 보내지 말든가.”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냥 엽서 받고 무시하면 되는데, 왜 자꾸 오는 거냐?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그거 욕이냐?”

“생각을 해봐라. 오늘 평일인데 너 학교는 어쩌고 여기 와있냐? 무작정 표 끊고 온 거 아냐?”

“남……. 친, 친구가 실종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데,”

“이제는 너 전에 있었던 일 다 기억하잖아, 지난번과 다르게. 그럼 나 안 죽은 것도 알잖아.”


석은 기정과의 대화에서 피곤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정말 갑자기, 석은 울고 싶어졌다. 손끝에 묻어나오는 눈물을 통해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너 울어?”

“야, 김기정.”

“왜.”

“나 너랑 9년 넘게 사겼었다. 너는 씨발, 나한테 안 미안하냐?”

“…….”


기정은 한참 말없이 앉아있었다. 석은 어느새 힘이 풀려 멱살 쥔 손을 내려놓았다. 다시 시작된 경전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기정이 천천히 입을 뗐다.


“너랑 헤어지고, 난 항상 여행을 떠나.”

“그건 알아, 새끼야.”

“아니, 말 끊지 말고 들어봐.”


꿉꿉하고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기정은 넘어져 까진 석과 자신의 손마디를 흘끗 보았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난 인천공항에서부터 질질 울면서 여행을 떠나고, 항상 휴대폰을 중간에 잃어버려서 가족에게 연락을 못 해. 그래서 난 실종신고가 되고, 넌 그런 나를 찾아와. 내가 세기로는 지금까지 수십 번이 넘었어. 그리고 난, 휴대폰을 잃어버리기 전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꼭 너에게 엽서를 써.”

“그게 그, 오지 말라는…….”

“아마 맞을걸. 내가 한번 꺼지라고도 보냈던 거 같은데, 뭐 아무튼.”

“어, 그렇게 보낸 엽서도 봤다.”

“그리고 넌 나를 찾아내고, 내가 안 죽은 걸 알아서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이 뒤가 있었단 말야?”

“그리고 끝. 우리 재결합도 안 하고 그냥 그러고 끝나.”


석은 기정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서,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김기정. 기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딱 한 번 내가 엽서를 쓰고 나서 다음날 우연히 부치지 않은 적이 있었어.”

“…….”

“그러니까, 이 운명에서 살짝 비켜 나간 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자 너는 나를 찾지 않았고, 나는 여행을 계속하거든. 그러다가 독일에서 내가 좋아하던 작가를 만나서,”

“그래서.”

“사겨, 그 사람이랑. 그리고 거기서 이 여행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고,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시에 올라가게 되거든.”

“요점이 뭐냐.”

“요점이라기보다는…, 나 여태껏 죽은 적도, 위험한 적도 없었는데.”


기정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느새 해는 밝게 떠오른 지 오래였다.


“그냥 거기서 1년 정도 살다가, 죽더라고. 교통사고였는지, 뭐였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잘 못 봐서 모르겠어.”

“뭐?”

“그리고 눈 뜨니까 다시 너랑 헤어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고…….”

“죽는다고?”

“아, 어. 그러니까, 너랑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난 죽는, 뭐 그런 건가 봐.”


석은 고개를 들어 기정을 바라보았다. 결론은 정해졌다.


“그럼 답은 하나네. 가자, 빨리. 오늘 당장 출발하면 학교는 징계만 당하고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기정은 석의 말을 듣자마자 손을 내저었다.


“석아, 내가 왜 자꾸 너를 물에 처 빠뜨린 지 모르겠냐?”

“뭐?”

“띨빡아, 넌 물에 빠지면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야 했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 때문에 온갖 더러운 물에 다 빠졌다. 돌아가서 약값 청구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

“난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아.”


황보석은 김기정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 기정은 스스로 1년 살다가 죽는 시한부 인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기정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이, 신이나 운명 그런 거라면, 난 차라리 안 할래.”

“그럼 죽는다면서.”

“보석아.”


기정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삶에서 난 정말 행복했거든.”


석은 재빠르게 쏘아붙였다.


“나랑 만났을 때 그렇게 불행했냐? 아, 우리 부모님한테 말도 못하니까? 내가 존나 예민하게 구니까 불편했냐? 그래, 거기서는 사방팔방 말하고 다니니 행복했겠지. 난 너랑 있을 때, 행복했어. 그러니까 내가, 내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를 미쳤다고 무단결근 때려가며 너를 찾으러 오겠냐? 이기적인 새끼, 그럼 가지마. 가지 말고 독일인지 프랑스인지 가서 차에 치여 죽든가.”


기정은 까져서 피가 나는 석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너는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래서 기어이 괌에 가서, 한국에서 인증도 안 되는 혼인신고서를 찍어 오더라고. 너, 곧 너희 부모님한테도 말하던데.”

“뭐?”

“보석아, 너 은근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니까. 그래서 내가 너랑 있을 때도 그렇게 좋았나 봐.”


기정과 석의 두 눈이 마주쳤다. 어디선가 또 다른 오열 소리와 함께 화장터에서 나온 연기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다시 하나의 죽음이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기정이 말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너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안 만나. 끝은 끝이잖아. 그리고 난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미래를 포기하는 거라고.”

“그 대신에 죽잖아, 미친 새끼야. 너는 죽고 싶어? 아저씨랑 아줌마 생각 안 해?”

“안 죽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난 그 전시에 내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거야. 그 경험을 꼭 다시 하고 싶어.”

“…….”

“그래서 죽는다면, 그것마저 내 인생 아니겠냐.”


석은 기정의 말을 곱씹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위에서 나는 종소리와 경전소리, 자동차소리만이 둘 사이를 메꾸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석이 입을 열었다. 


“야 김기정.”

“왜.”

“그 작품, 맘에 드냐?”

“완전. 내 역작이야, 인마. 너도 한국에서 봤다고 나한테 연락 남기더라.”


석은 강을 보았다. 힌두교의 성스러운 강,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강,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일부, 죽음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삶, 그럼에도 우리가 원하는 길을 걷는다면, 행복하다면…. 관광객들이 떠들면서 다가와 향로에 새 향을 꽂았다. 향 내음이 멀리 퍼졌다. 석은 기정의 옆얼굴을 보았다. 기정을 좋아했던 이유는, 기정의 살 내음을 맡았던 이유는, 기정의 콧대와 코와 찡그린 코, 입술, 담배 내음, 눈, 약간 낮은 목소리와 달리던 모습, 공을 건네던 모습, 팔뚝, 물로 안 지워지는 물감을 얼굴에 묻히고 웃던 기정, 공소리, 석의 코끝에서 바스락거리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 음악에 맞춰 웃기게 석과 춤을 추는 기정, 그리고 그림을 보는 기정의 모습이 행복한 기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기정이 행복하면, 석은 기정을 사랑했다. 기정이 눈물을 흘리며 저와의 카톡 대화를 볼 때, 석은 그다지 즐겁지도, 사랑을 느끼지도 않았다. 석은 기정이 행복하기를 원했다. 기정이 석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것도, 먹지 못하는 것들을 먹는 모습도, 보지 않는 걸 보는 모습도 사랑하는 모습도 기정을 행복하게 했기에 석은 기정을 사랑했고, 기정과의 연애를 사랑했고, 기정을 꽤 좋아했다. 김기정은 행복하면 사랑스러웠다. 황보석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황보석은 김기정을 사랑했다.

석은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석을 보며 기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냐?”


석은 강을 등지고 섰다.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반사된 그의 안경은 닦지 못한지 좀 되었는지, 지문 자국투성이였다. 기정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한국에 가는 게 운명인 거 같은데,”

“…….”

“난 운명 안 믿어. 너도 알잖아.”


기정이 부시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눈물이 흐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석은 했다. 김기정은 코를 찌푸리며 웃기게 웃을 때, 인물이 훨 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기정아, 나를 막아.”


석이 말했다.


“그 대신에 너 장례는 아저씨 아줌마 생각해서 무조건 한국에서 치를 테니, 알아서 해라. 예온이랑 호진이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기정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기정은 석에게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석은 눈을 감고 곧 뒤통수에 마주할 갠지스 강의 뜨뜻미지근한 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건, 백구십오의 제 코에 부슬부슬 마주하는 까만 머리카락, 따뜻하지만 단단한 허리, 드러난 맨살은 차가운 팔, 담배냄새, 눈을 뜨니 마주하는 기정의 눈, 그리고 작게 부딪혀 오는 기정의 입술이었다. 석은 고개를 내려 기정의 따뜻하고 차이 맛이 나는 입술을 조심히 삼켰다. 느릿하고 눈이 부신 키스였다. 살살 윗니로 기정의 아랫입술을 물자, 기정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다시금 입술을 물자 기정이 좀 더 얼굴을 들어 맞춰왔다. 기정이 석의 앞니를 하나둘 훑고는 둘은 두어 번의 버드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김기정.”


석이 말했다. 기정은 눈 부신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밝게 빛나 보였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석아, 내가 이 여행을 잊지 않게 해.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운명 따위 안 믿는 게 너잖아.”

“대신에 너 나 학교 잘리면 재산 상속시켜라.”


기정은 코를 찌푸리며 하하 웃었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사랑했다.


“너한테 반절 줄게.”


기정이 말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와 닿았다. 석은 문득, 이제야 정말 길고 단 잠이 들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려다본 기정의 삐죽한 머리카락은 고요하고 조용한 밤과 잠처럼 까만색이었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그럼 나도.”


사랑한다.


귓가에 먹먹하게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은 갠지스 강의 물이 제 뒤통수에 닿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그다지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찝찔한 물이 코와 입에 흘러들어왔다. 갠지스 강의 위생상태에 대한 유튜브를 무시하는 건 꽤 일이었다. 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깊고, 조용하고, 푹신하고, 따뜻하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황보석이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 해를 맞으며 눈을 떴을 때에는, 그의 휴대폰에 김영인씨의 통화기록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석은 괜찮았다. 좋았다. 오랜만에, 개꿀잠을 잤으니까 말이다.



***



석은 뉴욕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몰랐다. 그의 관절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소리 지르고 있었다. 농구선수로는 작은 키였다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황보석은 꽤 큰 키였다. 석은 김영인으로부터 기정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받아서, 기정의 친구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난 3월 8일, 김기정 작가가 세상을…, 까지 치고서는 석은 극심한 피로감과 뻐근한 목 통증을 느꼈다. 한참을 울던 기정의 애인은 수염에 옅은 침 자국을 남기면서 자고 있었다. 제 옆에 앉은 김영인 역시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석은 영어로 쓸 말은 기정의 애인, 에즈라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진장 힘들었다. 역시! 영인 아저씨는 이래서 나한테도 상주를 부탁한 거구나.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석은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정말이지 피곤했다. 저기 어디 화물칸에 실려있을 작아진 기정을 생각하니, 그래도 여기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까지 도착하기에는 아직 열두 시간이 넘게 남았다. 한숨 자고 써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리면 삼사일은 잠도 못 자고 피곤하게 있어야 했다. 연차를 싹싹 빌어서 쓰기도 했고, 여러모로 배려해준 덕에 발인까지는 학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석은 휴대폰을 끄고, 손을 뻗어 독서등을 껐다. 목을 천천히 비행기 좌석에 뉘였다. 조용한 기내에서 졸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졌다. 상상도 환상도 공상도 망상도 몽상도 아닌 꿈이 펼쳐졌다. 검은 시야가 점차 꿈의 색 모를 시야로 바뀌었다. 김기정이 보였다.



황보석은 지금 김기정의 시체 옆에 앉아있다. 


아니, 그가 애써 고개를 돌린 채 보려 애쓰지 않고 있는 저 시체가 김기정인지 아닌지는 사실 황보석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뒤에서는 현지인들이 힌디어로 떠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시체의 처리 방법과 경찰을 부르니 마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보아도 관광객 같아 보이는 황보석을 끌어내는 것도 대화의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석은 모든 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치부하기로 하며 눈을 감았다. 넘실거리는 강물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강둑을 철썩거리며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는 해가 뜨는지, 뻘건 빛이 눈두덩에 내려앉았다.

황보석은 지금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위생학적으로 꽤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라나시의 강가에는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 있다….’ 라며 괜한 위험을 경고하는, 인터넷에서 본 괴담 한 구절이 생각났다. 갑자기 바지 밑단 드러난 살이 간지러워졌다. 다리를 타고 이상한 벌레가 꾸물꾸물 기어들어와 콱 뇌까지 침투해버릴 것만 같았다. 석의 감은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미간 역시 쪼그라들었지만, 석은 끝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 말을 떠올리며 석은 조금씩 진정하려 애썼다. 

석은 기정을 보았다. 눈을 꼭 감아서 까만 시야가 점차 머릿속의 바라나시 강둑으로 변해가고, 제 옆에는 여명이 얼굴에 얹어진 기정이 앉아있었다. 아, 서 있었다. 상상은 너무 어려웠다. 석의 눈동자는 자꾸만 꿈틀거렸다. 다시 시작해보자, 기정이 서 있었다. 기정은 온갖 색의 천 쪼가리로 기워진 알리바바 바지를 입고, 웃기게 생긴 지구가 그려진 프린팅의 티셔츠를 걸친 채, 갠지스 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떠내려가는 시체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웩, 여기서 석의 상상이 잠시 멈췄다. 그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다 불타지 못한 채 떠내려가는 시체라니…! 아, 다시 집중하자. 다시 돌아본 기정은,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마치, 아주 자연스러움을 본 것처럼, 삶과 생과 죽음과 신체의 한순간이 전혀 역겹지 않은 것처럼, 가난한 자들이 사랑하는 이의 시신을 겨우겨우 반쯤이라도 태워서 아팠던 이승의 삶을 조금이나마 정화해주기 위해 애쓴, 그런 사람들의 사랑을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마냥


석은 기정과 헤어지고 나서 다음날도 출근했다. 이유는 없었다, 평일이니까. 직장인이라면 이별 즈음은 출근 전에 다룰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던 것인지, 평소보다 늦게 서부간선도로에 진입했고, 석의 계산에 따르자면 7시 35분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막히는 구간인 금천 IC를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길에서 20분이나 시간을 소요하고서는 운동장의 흙먼지를 탈탈 굴려대는 차에서 그대로 빠져나와 교무실을 향해 달려갔다. 자신은 출근했는데, 24시간이 채 안 되어서 헤어진 전 남자친구분은 비슷한 시간대에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건, 석쌤 피곤해 보인다며 점심시간 이후 박카스를 건네준 옆자리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서였다. 

황보석은 분노가 치밀었다. 남은 수업은 없었고, 교무실에 한가로이 앉아서 타닥타닥 서류를 만들며 업무를 보고 있었지만, 뱃속에서는 쓰게 위액이 넘어갔다. 헤어짐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몇 주 전에는 이런 지지부진함이 괴로워 빨리 결단이 났으면 했었던 사람도 황보석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쳐온 이별은 괴로웠고, 마지막에 은은하게 쌍욕 섞인 눈빛으로 잘살라는 말도 한마디 없이 짜증 내며 가버린 전 남자친구가 자유롭게 사람 사는 날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속이 쓰렸었다. 


‘헤어진 이유를 모르겠다.’ 석은 3개월이 지난 후, 가까스로 찾아온 황금연휴에 겨우겨우 만난 대학 동기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여자애들 속 알려고 해봤자 어려워.’ 이 동기는 기정을 여자로 알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정의 속은 언제나 알기 어려웠다. 푹 쉬어지는 한숨에 동기는 파채를 덜어주며 격려했다. 속 알맹이가 비어있는 형식적인 말이었다. 슬슬 일어나고 싶은 건지, 자꾸만 어깨너머로 멍해지는 친구의 눈빛을 모른 척하면서 석은 메뉴판을 뒤적였다. 아직 사람 사는 사랑했다. 석은 헤어지기 싫었다. 기정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석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둘은 인제 그만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은근히 결혼을 재촉하며, 마찬가지로 기정을 여자로 알고 있는 석의 가족 때문인지 아니면 기정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서 또 떠나고 싶은 것 때문인지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수는 없었겠지만. 

하지만 석은 기정에게 그때처럼 다시 한번 기대했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걸을까 말까 하는 이 길을 대번에 걷어차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기정이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래서 둘의 연애도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나가 주기를 기대했었다. 석의 부모님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방랑벽이 있다면 그저 한 번 멀리 떠났다 오기를 바랐다. 사실 그는 기정에게 어느 정도의 무모함을 원했던 걸지도 모른다. 황보석은 김기정이 석을 길러 낸 황보종배씨와 손경희씨가 키가 멀대만한 자식이 신랑이 둘인 결혼식을 여는 걸 바라만 보게 만들어 버리라고, 그런데 그 신랑 중 하나가 자식이 고등학교 때까지 같이 살부비며 공놀이하던 친구 중 하나인 걸 깨닫게 해버리라고, 독산동에 있는 중학교에 근무 중인 체육교사가 돌리는 청첩장을 통해서 그 선생님, 남자랑 결혼한대, 해버리게 하라고 말이다. 물론 석은 기정이 진짜 저렇게 행동했다면 쓰러졌을 테고, 기정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고, 둘은 싸웠고 그리고 끝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헤어졌다. 


왁자지껄한 황톳빛 고깃집의 벽을 멍하게 바라보던 친구와의 술자리가 파한 후, 석은 비틀거리며 도어락을 열고 제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푸우 푸우 숨을 내쉬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석은 느끼고 있었다. 초와 분과 시는 야속하게 시계의 바늘을 돌렸고, 달력이 팔랑팔랑 넘어간 지 오래였다. 밀어 넣듯 먹은 삼겹살이 자갈처럼 속을 쳐댔다. 푹푹 꺼지는 기분을 느끼며 석은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예처럼 잠옷으로 갈아입고 아침에 널부러놓고 간 옷을 대충 서랍에 쑤셔 넣었다. 의미 없이 유튜브를 뒤적이다가 문득 쓰잘데기 없는 담배 냄새와 절간 향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이별을 실감한 석은, 휴대폰을 엎어놓고 충전기에 꽂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가 잠에서 퍼뜩 깨게 된 건 그로부터 5시간이 지나서였다. 비몽사몽 받은 전화에서는 떠듬떠듬 울음소리가 섞인 배경음에 섞인 기정의 아버지, 김영인씨의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아, 혹시 최근에 기정이랑 연락했니…?’ 피곤했고, 졸음이 쏟아졌고, 그보다 더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석은 느꼈다. 석은 정말 피곤했고, 아직 미묘하게 남은 알콜의 막타로 잠을 자고 싶었지만, 눈이 떠졌고 이내 그는 차를 몰고 네비를 찍고 출발시켰다. 


늦은 새벽에 갑자기 본가에 들이닥친 기정이 아무런 말도 않고 곤히 자던 김영인씨와 맥주 한 캔과 함께 TV 예능을 보던 그의 어머니를 깨웠다. 눈가에는 눈물이 흐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던 기정을 보며 둘은 가타부타 그를 안아주려 했지만, 기정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미소만 지어대며 제 큰 가방에 옷을 집어넣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기정의 방을 뒤로한 채, 그는 잠시 여행을 다녀올 거라고 했다고 한다. 원체 그런 식으로 훌쩍 떠나는 일이 많았던 터라, 김영인씨는 다시 들어가 잠을 청했고, 기정의 어머니는 찰랑찰랑 남은 맥주를 비우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정은 렌터카 앱을 켜서 렌터카를 빌리고, 공항에 가서 출국한다며 심사대 앞에서 사진을 보내고서는 떠난 지 4일이 지난 지금까지 연락도 없고 연락을 받지도 않는다고, 역시나 피곤함에 절어있는 갠지스 강 숙취에 절어있는 황보석에게 설명했다. 황보석은 이상하게 어렸을 때보다 힘겨워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면서 차마 더 이상 황보석 자신도 김기정과 연락을 하지도, 보지도 않을 사이라는 걸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기정은 거대한 용기를 내어 자신의 부모님에게 둘의 사이를 말했었다. 석은 온종일 빙글빙글 제 집을 돌면서 기정의 선택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불행한 생각만 했었다. 마침내 기정에게 전화가 왔을 때, 석은 기다린 티가 나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목을 가다듬고 받았다. 기정은 평탄한 목소리로 뭐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석은 주어를 두지 않고 상황에 대해 질문했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지.’ 그 뒤로 기정이 주말에 자빠져 자거나 술을 퍼먹거나 할 때에, 혹은 아주 가끔 김영인씨에게 꽤 괜찮은 과일세트가 들어올 때마다 석에게 연락이 왔었다. 석은 그 순간마다 자주 기정과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묘하고 몽글거리는 감정과 함께. 


석은 제 차 조수석에 김영인을 태우고서는 영사관으로 차를 몰았다. 김영인의 손은 땀에 절었는지, 그는 초조하게 제 손을 자꾸만 청바지에 닦았다. 석은 꽉 막히는 도로에서 톡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김영인은 경찰에는 이미 신고를 했는데, 거절당했다든지, 앞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너무 빨갛다든지 등의 의미 없는 말만 자꾸 늘어놓았다. 석은 도저히 그의 앞에서 이미 자신과 기정이 헤어졌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기정이 온전히 돌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영인과 그의 아내가 아파트 복도등이 꺼져가는 어둠 속으로 문을 닫고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 석은 차에 올라탔다. 어설픈 위로와 희망의 말로 배웅하고 난 뒤에야 현실이 몰려왔다. 기정이 실종된 건 맞지만, 연휴는 끝이 났고, 곧 석은 출근해야 했다. 이제서야 제집으로 향하면 아무리 밟아도 새벽 1시는 되어야 도착할 것이다. 석은 안경을 벗어 컵홀더에 대충 접어 넣고서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잠을 자고 싶었다. 비슷하게 졸음이 쏟아져 보이는 편의점 알바생한테 캔커피 세 캔을 결제하고 난 뒤, 석은 커피를 속에 들이부으면서 차를 출발했다. 

필로티에 차를 박을까 조심하며 주차하고 난 뒤, 내려서 잠깐 스트레칭을 한 후 시간을 보니 벌써 다음날 새벽 1시 20분이었다. 앞으로 5시간이 지나면 황보석은 다시 출근하러 나가야 했다. 기껏해야 서너 시간 정도만 잘 수 있었다. 석은 졸음이 잔뜩 묻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빌라 입구에 들어섰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먼지 속에 방치된,

요즘 누가 우편을 받겠는가?

빌라주민은 전부 자취하는 1인 가구라 쿠x이나 마x컬리의 열렬한 사용자였기에, 집 앞으로 배송되는 상품에 익숙했다.

그러나 피곤을 가중시키는 LED 하얀색 가로등이 유달리 비추면서

그날 따라 갑자기 더더욱

열어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게 하는

일렬의 네모난 우체통, 그 중 석의 집인 701호 우체통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날은 갑자기 그러고 싶어서 석은 열어보았다. 


뽀얗게 쌓인 가루가 훅, 하고 날렸고 여닫이식으로 되어있는 한순간이 경첩 사이에는 뭉쳐 희끄무레해진 먼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두컴컴한 내부에 손을 넣어 더듬기로 한 것도 평소의 황보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유독 그러고 싶어서, 석은 손을 넣어 더듬었고, 딱딱한 종이가 그의 손끝에 걸렸다. 전단지의 날카롭고 미끄러지는 비닐 코팅이 아닌, 어딘가 생경하고 살아있는 종이가 나왔다. 그의 손바닥만한 종이는 탁한 흰색을 띠고 있었고, 코끼리가 먹다 만 것처럼 섬유질이 눈에 보였다. 거칠었고, 요즘 흔히 말하는 ‘감성’ 느낌이 물씬 나는 종이의 정체는…,

이국적인 강가와 불타는듯한 노을로 가득한 하늘을 찍은 사진이 담긴 엽서였다. 

석은 자신에게 엽서를 보낼 사람을 빠르게 머리로 추려보았다. 

3개월 전에 헤어지고, 지금 행불자 상태가 된, 미친 전남친을 제외하고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교 후배 상언이? 재혁이? 하지만 둘은 지금 열심히 프로농구 코트(벤치에 있는 시간이 더 길지만)를 누비고 있느라 외국에 갈 시간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석은 앞면의 사진에서 일본이나 유럽도 아닌 곳의 자취를 느끼고는 휙, 엽서를 뒤집었다. 엽서 뒷면에는 휘갈겨 쓴 한국어와 또박또박 정자지만, 기성품의 공장에서 찍어낸 알파벳이 보였다. 석은 그 글씨를 알았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알고 지낸 세월만 장정 합쳐 이십 년이 넘고, 입을 맞댄 시간, 그러니까 석이 종종 그와의 결혼을 생각한 시간만 십 년이 넘어가는 기정의 글씨였는데….


석은 빌라의 자동문 앞에 걸터앉아 컴컴한 새벽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정의 글씨로 휘갈겨 쓴 엽서에는, ‘오지 마!’ 라고 적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그가 이 엽서를 보낸 것이 분명한 주소가 알파벳으로 적혀있었다. 네x버에 영문 주소를 검색했더니, 이상한 웹사이트들만 줄줄이 나오자, 황보석은 내수용 검색엔진이라며 투덜거리다가 구글에 주소를 입력했다. 그러자 지도 앱으로 다이렉트되는 한 게스트하우스의 정보가 떴다. 위치는 그렇게 다들 자아를 찾아서 간다는, 안전필수 황보석이 단 한 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은, 인도였다. 이내 황보석은 엽서 앞 사진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유튜브로 본 그곳이었다. 유튜버가 호객꾼을 ‘참교육’하고, 비위생적이라며 길거리 음식을 경악하는 걸 컨텐츠로 삼는, 그렇지만 해가 뜨고 지는 빛이 강에 드리우는 걸 보며 낭만에 젖을 수밖에 없는 갠지스 강의 도시였다. 석은 그들의 영상을 화면 너머로 보면서 자신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니까, 자의로 말이다. 

하지만 타의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의로 가지 않기로 한 곳이지만, 기정이 실종된 지금, 그의 글씨체로 온, 그것도 ‘오지 마!’라고 적혀있는 수상한 엽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체통의 상태를 보아 할 때, 엽서는 최소 한 달 전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기정은 본인의 실종 이전에 이 엽서를 보낸 게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취자의 고성방가를 묵묵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건 딱 질색이었다. 그가 예측할 수 없는 것들. 세상의 이치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두렵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놨던 이상한 떨림과… 이별 등등. 하지만 하지만 석은 기정과의 연애를 통해서 세상에는 그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숨이 턱 차게 많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 엽서도, 그중에 하나이다. 아니, 어쩌면 기정이 남기는 마지막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기적’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석은 잘하지도 못하는 상상을 하려 노력했다. 비행기를, 지금, 그가, 경유하는…, 아버지한테 설명을, 어떻게 취직한, 아직 정규교사도 아닌데, 돌아와서 뭐라 해야 할지, 교감의 히스테리, 자동차의 할부금과, 보험, 연금, 노후, 재취업, 그리고……. 황보석은 다시 한번 생각에 빠져들었다. 손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번에는 수월하게 상상해 낼 수 있었다. 사랑,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 삐죽 솟은 머리, 스치듯 나던 살 내음, 입술, 코, 눈, 약간 낮은 목소리, 달리던 모습과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과 뛰라고 소리치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과, 튕기는 공소리의, 김기정. 


황보석은 인천공항 주차장에 렌터카를 반납하면서 비용이 너무 비싸다고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따뜻한 나라에서 돌아오는 모양인지,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옷을 입은 일가족이 차에 타다 말고 그를 흠칫 바라보았다. 석은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날은 밝아오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차를 돌려 학교로 향한다면, 밤은 샌 꼴이 되겠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레도, 그리고 그리고, 계속되는 나날도, 문제없이 무탈하게 평범하게 일생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그, 사소한 선택의 순간에서 여즉 없애버리지 못한, 고등학교 때에도 버리지 못해 끝내 하나의 흔적으로 남은 충동적이고 낭만으로 가득하고 가끔 자유롭게 여겨지는 김기정의 흔적이 석으로 하여금 발을 주차장이 아닌 출국장으로 향하게 했다. 

집에 처박혀있었던 티가 풀풀 나는 커다란 등산 가방을 카운터에서 부치면서 황보석은 정말로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싶다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어두컴컴하지만 아늑한 침실과 포근한 냄새와 적당히 습하고 적당히 건조한 공기에 기분 좋은 이불, 그리고 무엇보다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와 석이 팔을 둘러 꾸욱 안을 수 있는 적당히 단단한 몸과 백구십오에 가까운 석의 키에도 제 코끝에 바스락거릴 수 있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와 함께 눈을 감고 아주 오래 깊고 달게 푹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황보석은 소원과 달리 단잠을 자지 못하고 자주 깨어났다. 좁아터진 저가항공의 이코노미좌석은 그의 다리 관절을 비트는 것처럼 압박했다. 창밖에는 떠오른 해가 눈이 아플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옆좌석에서는 액션영화라도 보는지 쨍그랑하는 소리가 에어팟을 뚫고 나왔다. 그는 도저히 감기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면서 경유지인 홍콩국제공항에 내렸다. 석은 내리자마자 경유 환승 표지판을 따라갔다.


천천히 걸어가며 황보석은 직선으로 이어진 구간에서 잠시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기정을 상상하려 애썼다. 그러자 검은 공간이 밝아지면서 차차 그가 걸어가던 공항의 경유 환승 구간이 그려졌다. 광둥어와 영어, 중국어와 때때로는 한국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가 기억하던 평소의 모습보다는 차분히 내려앉아 있지만, 여전히 버석해 보이는 뾰족한 검은 머리칼과 정수리, 김영인이 보여준 커다란 고릴라 키링이 달린 가방, 연신 훌쩍거리는 코, 비행기에서 내내 운 것인지 눈물의 소금기가 말라붙은 뺨의 기정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며 재빠르게 걷다가, 쏟아지는 공항의 햇빛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입술을 꾹 물고서, 기정이, 석이 제일 무서워했던, ‘곧 사고 칠 것 같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결심하고서는 단단한 발걸음으로 쑥쑥 걸어가는 모습을 석은 볼 수 있었다. 양쪽 가방끈을 야무지게 쥐어매고, 김기정은……, 기정은…, 기정이는….

황보석은 눈을 떴다. 기정이 걷던 통로를 다 걸어나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제 머릿속의 기정처럼, 창문이 온통 통유리인 홍콩공항의 밝은 모습에 절망하고, 게이트 옆 딱딱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딱딱하지만 가로막히지 않은 의자에서야 겨우 다리의 관절을 펼 수 있었다. 석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공항의 와이파이를 잡았다. 연신 울리는 카톡 알림음 사이로 보이는 메시지의 내용을 애써 무시하고 김영인씨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었다. 그는 기정의 티켓 내역을 통해서 기정이 홍콩을 거쳐 인도로 향했다고 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석은 생각했다. 한국에서 떠나는 가장 이른 경로이기도 하니까, 둘의 경로가 겹치고 있었다. 석은 김영인에게 온 메시지에 답장으로 ‘저 지금 기정이 찾으러 가고 있어요.’라고 보내고서는 와이파이를 껐다. 아마 그에게서도 곧 무수하게 많은 카톡 폭탄을 받게 될 테지만, 그리고 학교쌤들과 가족들에게 온 엄청난 양의 연락도 더더욱 쏟아질 테지만, 아무렴 어쩔 수 없었다. 석은 약간의 씁쓸하고 불안한 후회를 느끼면서 인도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전화 수신 거부까지 걸어놓고 나니, 이제는 울릴 일이 없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둘러본 기내는 이전 비행기보다 한층 더 요란스러워져 있었고, 석은 이제 더 좁아 팔꿈치까지 비틀리기 시작한 좌석 너비에 수면을 포기하고 뜬 눈으로 멍하니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가끔가다 드넓은 바다와 오밀조밀 어디인지 모를 육지가 보이며 비행기는 날아갔고, 그는 정말로 잠에 들고 싶었다.

비행기가 착륙알림음을 내며 우당탕탕 거칠게 착륙했다. 아주 짧은 잠에 빠졌던 황보석은 뒤틀린 관절이 지르는 비명에 깨어났다. 그런 그를 맞이하는 건 몇 시간째 다운받은 쇼츠모음집 영상을 보는 옆자리 사람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컴퓨터 효과음이었다. 그는 한층 더워진 공기를 느끼며 인도 뉴델리의 간디 국제공항 입국수속을 밟았다. 얇은 긴팔티의 소매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입국장의 직원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 높은 그의 얼굴과 여권을 대조하기 위해서 석에게 계속해서 ‘다운, 다운’이라고 말했고, 석은 낑낑거리면서 무릎을 굽혀 얼굴을 창구에 들이밀었다. 공항은 드넓었고, 사람은 더욱 많았다. 귓가에서 힌디어와 영어와 여러 언어가 섞여 들렸다. 석은 공항 내에서 환전과 유심을 파는 점포 한 곳에서 유심을 사서 갈아 끼웠다.

석은 공항에서 철도를 타고 뉴델리역으로 나갔다. 바야흐로 그의 전 애인이 가고 싶어했고, 이 나라에서 사라졌고, 그는 갈 생각도 계획도 없었던 인도였다. 요란한 말소리에 경적소리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묘한 향신료의 냄새가 한국보다 더운 바람을 타고 밀려들었다. 역으로 들어가는 사람, 나가는 사람, 그리고 그냥 사람. 남들보다 시야가 두 뼘쯤 높은 석은 사람들의 연이은 행진에 밀리지 않게 기둥 근처로 가서 휴대폰을 켰다. 석은 여기서 김기정이 어떻게 인파를 뚫고 갔을지 상상해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지갑과 여권이 아직 바지 주머니에 있다는 걸 생각하자, 굳이 눈을 감지 않기로 했다. 그는 몰려오는 인파와 쏟아지는 피로와 누적된 좁은 좌석 관절 뒤틀림증으로 바로 기정의 엽서에 적힌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도시로 향하기보다는 하루 묵고 가기를 선택했다. 물론 홍콩에서 경유하면서 찾아본, 인도 철도여행 유튜브와 족히 한나절은 넘게 걸리는 무지막지한 이동거리 때문이기도 했다. 석은 역 근처에서 손을 휘저으며 손님을 끄는 릭샤 하나를 잡아타고 미리 예약해둔, 그래도 돈을 꽤나 쓴 괜찮은 호텔로 향했다.

딸랑딸랑 종소리가 가득한 거리였다. 석은 주머니 속 지갑과 여권을 손으로 꽉 쥔 채 잔뜩 굳어서 릭샤에 실려갔다. 귓가에서 기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뭐 그리 긴장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석은 가끔 그런 기정의 여유가 부러웠다. 김기정의 여유는 석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자신이 화내고 계산하고 계획할 때마다 기정은 막지르고 놓아줄 줄 알고 즉흥적이었다. 김기정과의 연애에서 황보석은 사랑과 스트레스는 동일하면서도 별개임을 알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그를 보면 스트레스가 없어졌다. 기정과의 연애기간 내내 석이 괴롭지 않았냐 하면 아주 아니지만, 우정의 기간과 성인 되고 나서 사귀기 시작해 근 십 년이 넘었었던 연애 기간을 생각해보면 황보석 본인은 그 스트레스를 주는 기정과의 여행을 꽤나 좋아했었다. 석이 할 수 없는 걸, 가지 않는 길을, 먹지 않는 걸, 보지 않는 걸, 하고 가고 먹고 보고 사랑했으니까.


호텔에 체크인하고 나자, 피곤과 허기가 몰려왔다. 릭샤 기사와의 흥정에 팔자에도 없는 실랑이를 거듭하느라 이미 지친 상태였다. 분명 교직 공부할 때, 토익이나 오픽이니 땄는데도 막상 영어로 말하려니 다 부서진 상태로만 말할 수 있었다. 체크인 과정에서도 살짝 버벅이면서 피곤은 극치를 달했다. 석은 룸서비스로 주문하려 했으나 메뉴판을 펼쳐보자 바로 접고 내려가, 로비에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에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 해가 지고 있어, 햇빛이 하늘에 남아있으니 조금의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거 스스로에게 설득했다. 석은 로비로 내려가, 길거리를 향해 뚫린 카페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대충 빵과 수프, 파스타, 그리고 거듭 강조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나서 석은 한 손으로 제 휴대폰을 꽉 쥐고 두 눈을 감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내 다시 한번 기정의 모습을 상상했다.

검은 시야는 어느새 정신없는 뉴델리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기정은 석과 달리 바로 기차를 타기로 결정했는지 쏟아지는 인파를 조심조심 헤치고 나가서 티켓을 끊어왔다. 석은 홍콩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표를 끊은 자신보다 배는 비싸게 구매하는 기정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플랫폼 아래로 내려간 기정은 초록색 벤치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렸다. 역사 안에 돌아다니는 커다란 개를 보기도 했고, 천장에 매달려서 철도 경찰들이 막대기를 휙휙 휘두르며 내쫓는 원숭이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기도 했다. 열차가 올 기미가 없자, 그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 바깥에서 노점상들이 음식과 잡화를 팔고 있었다. 기정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세모난 튀긴 만두 같은 음식을 사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베어 물자 김이 나는 사모사 튀김은, 석에게도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내 기정은 더운지 옷 목부근을 잡고 펄럭거리더니, 옆 노점상에서 티셔츠 한 장과 바지 하나를 사왔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가서는, 여전히 열차가 올 기미가 없는 플랫폼을 뒤로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만 한 차이 통을 들고 다니는 소년에게 차이 한 컵을 사 마시고, 드디어 온 열차에 올라탔다. 푸른 페인트가 덕지덕지 발린 기차에서 기정은 덜컹거리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황보석은 음식이 나왔다는 말에 눈을 떴다. 밖은 해가 지면서 남긴 빛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석이 강조한 대로 얼음을 잔뜩 넣은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면서 그는, 아마 기정이 산 사모사, 차이, 티셔츠, 바지값을 전부 합쳐도 자신이 낸 릭샤 값보다 덜 나왔을 거로 생각했다. 음식은 그럭저럭 맛있었다. 석은 비싸 보이는 버터를 빵에 발라먹으면서 기정이 사 먹은 튀김을 생각했다. 절대, 먹지 말아야지. 튀김의 기름이 검은색이었다는걸 기억해내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값을 치르고 나오면서 황보석은 호텔 프런트에서 미리 예매한 기차표를 프린트했다. 명실상부 아이티의 나라인 인도인데도 인터넷이 미치게 느려서 석은 몇 번이고 다시 로그인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딩아이콘을 봐야만 했다. 피로가 머리끝까지 차 있었다. 겨우 뽑은 기차표 종이를 반 접어서 가지고 객실로 올라가면서, 황보석은 오늘만큼은 기필코 깊은 잠을 자리라 다짐했다. 다행히도 호텔 객실 이불은 적당히 부드랍고 포근했으며, 에어컨에 달린 제습 기능 덕에 덥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지 못했다. 무겁게 내려앉는 쌍꺼풀진 눈이 번뜩번뜩 뜨였다. 잠이 들려 하면, 기정의 모습이 그려졌다. 김기정은 에어컨도 나오지 않고 선풍기만 돌아가는, 덜컹이고 시끄러운 인도 여객열차의 슬리핑 베드 칸에서 야무지게 벙커 침대를 내려서 쿨쿨 자고 있었다.

결국 황보석은 거의 자지 못했다. 푹신하고 좋은 침대에 적당한 온도에 완벽하게 고요하지 않지만 조용한 바깥까지 최적의 수면조건이었지만 눈만 감으면 어디론가 향하는 김기정, 아니면 온갖 다양한 사인으로 죽어있는 김기정이 떠오른 탓이었다. 호텔 측에서 무료로 방을 업그레이드해준 탓에 백구십오가 혼자 자도 가로로 너무 넓은 침대는 눈을 뜨기만 하면 외로움만 증폭시켰다. 그와 한 침대에서 대충 얽혀서 자던 감각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지도 헤어진 지 세달, 헤어지기 전 권태기 두달해서 어언 육 개월이 넘었음에도, 석은 팔과 팔이 얽혀 공기가 닿는, 맨살은 차갑고 이불 아래 허리는 따뜻한 그 체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외롭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석은 충혈된 눈을 부비며 새벽의 쿰쿰한 공기를 마셨다. 호텔에서 불러주는 무진장 비싼 택시를 타고(석은 이 돈으로 커피가 몇 잔일지 생각했다, 아니 차이가 몇 잔일지) 뉴델리역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그의 열차는 기정의 열차처럼 연착되지 않았는지 플랫폼에 서 있었다. 기차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줄을 서서 타는 수많은 사람을 지나, 석은 높은 등급의 한가한 칸에 탔다. 그의 침대칸에는 에어컨도 나왔고, 웰컴드링크로 추정되는 작은 물병도 놓여있었다. 아래층 침대에는 먼저 온 나이 지긋한 흰 수염의 노인이 신문을 보고 있었다. 석은 이곳에서 차라리 푹 자는 계획을 세웠다. 가방을 옷장에 쑤셔 박고 나서,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눈웃음을 짓고 나서 그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석의 수면 계획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너무 키가 컸다. 바다 위로 낚여 올려진 물고기처럼 다리를 한없이 옆으로 웅크려야지 침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쿡쿡 쑤시는 무릎을 접어서 끙끙대던 석은, 결국 꾸벅꾸벅 졸기, 라는 선택지를 택하고는 애매하게 머리를 벽이 기대고 누웠다. 목이 뻐근하게 아파오는 걸 무시하면서 눈을 감은 그는, 정말 잠에 들려 했으나 다시 검은 시야에 기정의 모습이 쓱쓱 그려지기 시작했다. 쾌적한 석의 좌석과 다르게 사람으로 꽉 찬 슬리핑 베드 칸에서 기정은 잠을 깼다.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난 후, 턱을 괴고 천천히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충전이 될까 의심스러운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 휴대폰을 충전시키고는, 기정은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시끌벅적한 그 칸에서 조용히 훌쩍이는 소리가 석의 귀에만 들려왔다. 석은, 기정이 보던 폰화면이 그와 석과의 카톡 대화창인 것을 알아냈다.

눈을 떴다. 황보석도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는 눈물이 쉬이 나오는 타입이 아닌지라, 그저 울적한 마음만 가지고 덜컹덜컹하며 달려가는 기차에 몸이 천천히 흔들릴 뿐이었다. 결국 석은 또다시 자는 걸 포기한 채로, 구부렸던 긴 다리를 침대 난간에 걸터놓고 기정이 보던 것처럼, 둘의 대화창을 한참 노려보았다. 아랫층 노인은 잠이 든 것인지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앞칸에서는 음식이라도 나눠 먹는지 왁자지껄한 말소리와 향신료냄새가 났다. 누군가 화장실을 쓰는지, 갑자기 지린내도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석은 토하고 싶어졌다.

바라나시역에 도착하자 출발할 때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노을로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열두 시간이 족히 넘는 시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차내식으로 나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석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움켜쥐었다. 역 밖으로 나오니 줄줄이 서 있는 릭샤들 사이에 기정이 열심히 먹던 세모난 사모사 튀김 노점이 있었다. 기름은 미친 듯이 거뭇거뭇하고, 뜰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찌꺼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석은 잠시 주저하다가, 정말 충동적으로 다가가서 한 봉투를 샀다. 막 튀겨서 꺼내준 사모사는 뜨거웠고, 후후 불어도 입술이 데일 것만 같았다. 석은 조심조심 베어 물면서, 이번에는 좀 더 나은 솜씨로 릭샤 기사와 흥정을 한 후, 기정에게서 온 정체 모를 엽서에 적힌 주소를 불러주었다. 기사는 으쓱하더니 릭샤를 출발시켰다. 석은 철판으로 된 표지판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릭샤에 앉아 사모사를 하나하나 먹어치웠다. 속이 끓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거니 애써 무시했다.

릭샤는 덜덜거리면서 갠지스 강가로 달렸다. 힌두교 인들의 성스러운 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을이 붉게 내려앉았다. 곳곳에서 금색 천으로 덮인 시신들이 화려한 가마에 실려 화장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타들어 가는 해는 강을 마치 불꽃처럼 벌겋게 물들였고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는 마치 강에서 나오는 것처럼 강을 뒤덮였다. 오열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석과 같은 관광객들이 호기심에 차서 걸어 다니고 있었다. 유골이 흩뿌려진 물을 몸에 끼얹고 기도하는 이가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종소리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삶과 죽음과 사랑이 한눈에 보였다. 석은 지나가는 모든 황금천 아래에 김기정이 누워있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우려 노력했다. 강물에 불꽃이 꺼져가듯이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기 시작했다. 기정아,

기정아. 김기정 이 미친 새끼야, 어딨는 거야, 대체…. 석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무릎이 릭샤 바깥으로 조금씩 튀어나왔다. 검은 시야가 천천히 타오르는 불꽃의 갠지스 강으로 바뀌었다. 기정은 석과 마찬가지로 덜덜거리는 릭샤를 타고 강가를 지나갔다. 그는 이 모든 광경을 목 빼놓고 바라보았다. 기정의 얼굴에 노을과 어둠과 그사이 오묘한 푸른색과 보라색이 내려앉았다.

석은 기정의 엽서에 적힌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는 한참 동안 주소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제 지갑과 여권을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꽉 쥐고는 지도 앱으로 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가정집처럼 보였지만, 옥상에 삐죽삐죽 올라가 있는 의자들과 걸려있는 꼬마전구들이 여기가 게스트하우스가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석은 조금 낮은 문에 머리를 쑤욱 숙이며 들어갔다. 기정이 여기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설렁설렁 걸어나왔다. 석은 청년에게 기정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지만, 청년은 영어를 통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석에게 그저 원 퍼슨? 이라고만 물었다. 결국, 그는 파x고를 켜서 번역해서 보여주고, 옆에 있는 종이에 냅다 김기정의 이름을 적었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이십 분이 넘게 손짓 발짓으로 실랑이하다가, 청년은 석에게 투모로우, 라며 말했다. 사장이 내일 온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석은,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서는 청년에게 한 손가락을 펴 보이며 숙박의 뜻을 전달했다. 청년의 안내를 받아서 도착한 일인실은 비좁고, 나프탈렌 냄새로 가득했지만, 창문 너머로 갠지스 강의 강가가 훤히 보였다. 해가 저물고 달이 떠서, 달빛이 창백하게 묻은 강을 바라보며, 석은 기정이 왜 이곳에 왔을지 알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황보석이 김기정을 이해한 순간이.


호텔보다 훨씬 딱딱한 침대에서는 괜히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석은 자려고 해도 이불 밖으로 발목이 자꾸만 빠져나왔다. 한국을 떠나온지 3일이 넘은 지금, 그는 오랜만에 카톡을 켰다. 미어터질 것 같은 메시지들에 교장에게 온 메시지도 있었다. 하다 하다 못해, 취직할 때, 적어냈던 비상 연락처의 부모님께 연락이 간 모양인지, 석의 부모님은 석에게 어디냐는 메시지와, 실종신고를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실종된 기정이를 찾으러 와서 황보석 저 자신이 실종 신고될 위기에 처했다는 이 상황이 모순되게 우스웠다. 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가면 재취업이 가능할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뾰족한 답도 수도 떠오르지 않자,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부모님께는 ‘저 잘 있어요, 학교는 그만둘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 하나 보내고, 김영인씨한테서 온 내려앉아 있지만 들어갔다. 그는, 대사관에서 한국인 실종자를 수색 중이라고 했다고 말해주었고, 마지막으로는 석에게 ‘석아, 너 회사는 어떻게 한 거니?’ 라고 물었다. 석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카톡을 끄고 벌렁 드러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피로한 몸은 수면을 원했으나, 뇌는 쉽사리 휴식에 들어가지 않았다. 애써 눈을 감았다. 머리는 또다시 검은 시야에서 기정을 보여주었다. 기정은 살포시 흩날리는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진 채 강가에 서 있었다. 석이 본 푸른 달빛이 그를 물들였다. 밤에도 쉬지 않는 화장터의 연기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뒤섞여 뿌연 시야 너머로 기정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석과 눈이 마주치고서는, 석은 눈을 떴다.

새벽이 밝아져 왔고, 해가 떠올랐다. 석은 또다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김기정과 눈이 마주친다. 그 눈을 석은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9년을 사귀었다면, 그의 부모님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텐데, 설사 내쫓겨도 석은 집도 있고 직장도 있는 어른이었는데, 뭐가 그리 무서웠을까. 그게 무엇이고 어떤 시선이길래 그는 기정과 멀어졌고 기정과 헤어졌을까. 그는 사랑한 것이 맞을까. 황보석은 헤어진 지 몇 달이 넘는 전 애인을 찾아서 직장도 무단으로 결근하고 비행기로만 열 시간을 날아왔다. 이건, 사랑이 아닌가. 아니라면 그는 대체 얼마나 겁쟁이인가.


황보석은 하늘이 해가 뜰 준비를 하며 푸르게 물들자, 억지로 자려던 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석은 나가고 싶어졌다. 강가를 향해 걷고 싶어졌다. 힌두어로 경전을 외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여명이 뜨기도 직전이었다. 석은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게스트하우스를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어제 보았던 청년이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차이를 만드는지 우유 끓는 냄새가 났다. 석은 새가 지저귀는 바깥으로 나갔다. 몇몇 부지런한 릭샤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화장터는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강가에는 물을 끼얹고 기도하는 이들이 즐비했고, 그런 독실한 신자들을 위해 차이 한 잔 팔 요량으로 나와 있는 차이 장수도 커다란 차이 통을 매고 앉아있었다. 강가 근처의 콘크리트 계단에 군데군데 놓여있는 금색 향로들에서 아직 불씨가 남은 향들이 타고 있었다. 문득 기시감을 느낀 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핑 도는 걸 느끼자 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검은 시야가 갑자기 조금 전까지 보던 길로 바뀌었다. 석이 걷던 길을 똑같이 따라 걷는 기정이 보였다. 석이 지나온 길을 지나, 석이 보았던 부지런한 릭샤 기사들의 릭샤를 피해 길을 건너, 꺼지지 않고 연기를 내뿜는 화장터를 지나, 기도하는 신자들과 어김없이 차이를 팔고 있는 차이 장수를 지나, 불씨가 아슬하게 남은 향로를 지나서 강가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계단까지. 물이 계속해서 부딪혀 초록색 이끼가 낀 그곳까지, 기정은 걸어갔다. 석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소란스레 모여있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시체를 보았다.

시체 주위에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있었다. 황보석은 인터넷에서 본인도 위생, 같은 글을 전부 무시하며 제 옆에 있는 강둑 계단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언뜻 고개를 돌리면서 본 시체는 사람들이 망자의 예를 지켜주려는 것인지 얼굴에는 흰 천을 덮고 있어서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땅바닥에 풀썩 쓰러진 몸뚱아리가 입고 있던 티셔츠는 그가 계속해서 보던 기묘한 데자뷔 속 기정이 입은 것과 똑같았다. 김기정이 뉴델리역에서 사모사를 사 먹고 남은 돈으로 노점에서 산 그 티셔츠와 그 바지였다. 옅은 상아색에 삐뚤빼뚤한 그림체의 지구가 그려진 티셔츠와 온갖 천을 덧대서 입은 알리바바 바지,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석이 수면에 들지 못했던, 인도에서의 모든 시간 내내 정말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그려지던 기정이 내내 입고 있던 옷이었는데. 숨을 몰아쉬는 황보석의 얼굴에 붉은 여명이 내려앉았다. 키도 장대하고 누가 봐도 관광객인 그가 한쪽 구석에서 몸을 비틀거리며 앉아있으니, 걱정이 된 사람들이 몰려와서 무어라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석에게는 전부 들리지 않았다. 감은 석의 시야에는 여명이 내려앉은 기정이 갠지스 강 너머를 바라보다, 그와 시선을 마주쳤고, 다시 그는 그토록 많은 죽음이 떠내려가는 강을 평온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물에 입이 잠겨가면서,

누군가의 손에 목이 졸리면서,

목에 칼이 닿으면서,

갑자기 구토하며,

울면서 스스로의 팔뚝을 잡고,

주르륵 쓰러지면서

죽어버렸다. 황보석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김기정이, 김기정이 자꾸만 죽고 있었다. 아니, 저기 쓰러진 시체가 김기정이었다. 기정이 죽었다, 이게, 그럼 나는 이제 기정이를, 아저씨한테는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 나는 이제 기정이를 만날 수 없는 건가, 살아있는 김기정을, 담배냄새가 섞인 살내음과, 굳은살이 박힌 집게손가락, 웃으면 찌푸려지는 콧대, 노래 부를 때 삑사리가 나는 목소리, 농구를 하던, 미술을 하는, 대학을 겨우 졸업한, 나와 함께 살았던, 입 맞췄던, 사랑, 사랑했던, 그리고, 그리고……,

 

“야!”


누군가의 손길이 눈을 감고 반쯤 계단에 누워있는 황보석의 어깨를 휙 잡아챈다. 석은 오랜만에 들린 한국어에 눈을 뜬다.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담배냄새. 왁스를 챙겨오지 않았는지 착 가라앉은 머리의 김기정이 황보석 눈앞에 나타났다.


“야! 너 뭐해!”


기정이 살아있었다. 지구가 그려진 티셔츠와 알리바바 바지가 아닌, 오색찬란 타이다이티셔츠와 코끼리가 잔뜩 그려진 후들후들한 바지를 입은 채로, 손에는 어디서 먹다 남은 차이 한 잔을 들고, 인도 바라나시에서 살아있는 채로 황보석과 만났다. 경찰들이 오면서 사람들을 해산시키느라 소리소리 지르는 와중에 말이다. 황보석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야, 너…,”


석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균형감각을 잡지 못해서 무릎을 한번 찧고는 손으로 겨우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김기정은 어어, 소리를 내며 그를 부축해 주려 했으나, 이내 황보석에게 멱살이 단단히 잡혔다.


“미친 새끼야, 너 이 씨발, 아!!! 김기정!!!”


기정이 슬쩍 웃었다. 기정의 내려간 눈매에 해가 떠오르며 나는 붉은빛이 잔뜩 물들었다. 살아있는 김기정이었다. 석은 피로도 잊은 채 꽥 소리 질렀다.


“웃어?”

“아, 미안.”

“너 당장 아저씨랑 아줌마한테 연락해, 너 죽은 줄 알았다고 나는.”

“아, 보석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뭐? 뭐가 중요한데 그럼. 너 실종신고 됐다고!”

“아니, 야, 왜 왔어,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엽서도 보냈는데!”


석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자기가 먼저 실종되어서 부모님이 우시면서 달려오는 불효 따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뭔, 무슨…, 아 그래, 그 엽서,”

“석아, 잘 들어. 이제는 다시 절대, 절대 오지 마. 나를 찾고 싶겠지만,”

“어? 야!”

“나를 찾지 마!”


기정은 들고 있던 차이 잔을 내팽개친 채, 석의 멱살 잡은 두 손을 힘껏 떼어냈다. 기정의 코끼리 바지에 갈색 차이가 잔뜩 묻었다. 이윽고 기정은 두 손이 떼어져 균형감각을 잃은 석을 힘껏 뒤로 밀었다. 석은 어디를 급히 잡을 틈도 없이 넘어지면서 풍덩, 하고 갠지스 강에 빠지고 말았다. 뒤통수에 뜨뜻미지근한 강물이 닿으면서 코와 입으로 물이 밀려들었다. 석은 갠지스 강의 위생상태와 외국인이 들어갔다가 감염되었다는 괴담과, 그가 본 수많은 화장터의 재가 흘러들어 가는 곳과, 그리고 씨발 무엇보다 죽은 줄 알았던 김기정이 살아있었는데 이제 자신이 죽게 생겼다는 것과, 범인이 바로 제가 살려내려고 그렇게 찾아다니던, 직장도 잃고 통장 잔고의 반절을 날리면서 찾아낸 전 남자친구라는 것까지 생각하면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더니,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힘으로 눈꺼풀이 감겼다, 석은 딱!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뜬 곳은, 인도의 성스러운 갠지스 강도, 사람이 파도처럼 쓸려오는 뉴델리도, 사방이 통유리인 홍콩공항도 아닌,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그의 오피스텔 침대 위였다.


황보석은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더듬어보니, 흘린 식은땀 정도만 이마에 남아있었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어보니, 날짜는 4일 전, 그러니까 석이 술에 취해 엎어져 자다가 김영인씨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깨어나던 그날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김영인씨로부터 전화나 연락 한 통 오지 않았다. 같이 술을 마신 동기한테서나 ‘괜찮냐?’라는 메시지 한 통뿐이었다. 석은 던져둔 티셔츠를 대충 주워입고 일 층에 있는 우체통을 열어보았다. 먼지와 누군가 넣고 간 헬스 전단지만 가득할 뿐, 엽서는 없었다. 석의 반 토막 난 통장 잔고도 그대로 복구되었고, 어떠한 카드도 인도행 홍콩경유 비행기를 결제한 흔적이 없었다. 마지막 결제는 석이 어젯밤 집에 들어오면서 편의점에서 맥주 4캔 만 이천 원을 산 것이었다. 베란다를 뒤져 겨우 꺼내 갔던 커다란 가방도 원래 있던 곳에 먼지와 함께 잘 있었으며, 길가다가 진흙이 잔뜩 묻었던 운동화 역시 깨끗했다. 무엇보다, 팔로우를 끊어버린 기정의 인스타그램에 몰래 들어가 보니, 당장 오늘 날짜로 태국에 있다는 사진과 글이 올라와 있었다. 석은 꿈도 이렇게 생생할 수 없다면서 하루 남은 귀한 휴일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냉수샤워를 했지만, 마지막에 확인한 김기정의 인스타그램 속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하루 종일 기분이 불쾌한 상태로 휴일을 보내고는 결국 다음날에 금천 IC를 7시 40분이나 되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똑같은 나날을 황보석은 보냈고, 어떤 날은 가끔 기정의 인스타를 차단했고 어떤 날은 가끔 들여다보았으며, 가끔 분노했고, 가끔 울적해지는 2달이 지나고 나서, 또 엎드려 자던 그에게 김영인씨의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기정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이고 자취를 감췄다고 했고, 석은 또다시 우체통에서 석양이 드리워진 발리 바닷가가 담겨있고, 기정의 필체로 ‘꺼져!’라고 쓰여 있는 엽서를 발견하고는, 또다시 무모한 선택 때문에 발리로 날아갔다. 이전과 똑같이 계속해서 잠을 자지 못했고, 기정을 보았고, 겨우겨우 도착한 엽서 속 주소에서 상상 속 기정과 똑같은 옷을 입은 시체가 파도에 밀려오는 걸 보았으며, 다시금 기정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김기정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보석아, 이번에는 제발 오지 마!”


황보석은 다시 밀쳐져 푸른 에메랄드빛 발리 바다에 처박혔고, 퍼뜩 눈 떠보니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황보석은 계속해서 베니스의 운하에, 오사카의 도톤보리 강에, 프놈펜의 메콩 강에, 몽골의 홉스굴 호수에, 하와이의 남태평양의 물에 흠뻑 빠졌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김기정은 매번 그를 밀쳐 물에 빠뜨렸고, 황보석은 매번 기정의 환상을 보고, 시체를 보고, 어거지로 꺾여서 비행기에 실려 다녔다. 결과는 항상 기정이 석을 뒤로 밀치면서 석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이 결말을 알면서도 석은 매번 엽서를 받고서는 기정을 향해 출발했고, 기정 역시 매번 엽서를 보내는 것이었다. 석은 이 모든 여정 내내 잠을 푹 잔 적이 없었다. 아, 황보석은 정말로 잠이 들고 싶었다. 돌고 돌아서 기정에게 온 엽서가 익숙한 강가이던 어느 날, 석이 다시 홍콩을 거쳐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던 날, 사람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뉴델리역을 이제는 익숙하게 헤쳐가던 날, 릭샤 기사와의 흥정에 가뿐히 성공하던 날,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와 죽음, 강물과 기도하는 이들과 삶, 그리고 또 다른 기정의 옷을 입은 시체와 강가의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도시에 도착하던 날, 석은 마침내 뒤로 나자빠져 갠지스 강의 물을 뒤집어쓰지 않고, 무게중심을 옮겨 기정을 어깨로 밀어뜨리면 앞으로 넘어질 수 있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기정이, 문짝만 한 황보석과 콘크리트 바닥 사이에서 눈을 찌푸리며 정신 못 차리는 사이, 석은 기정이 도망갈 수 없게 그의 목덜미를 잡고 기정의 위로 올라탔다.


“아, 황보석, 존나 아파….”

“이거 뭐냐, 빨리 설명해라.”


기정은 손을 들어 석의 볼에 가져다 댔다. 황보석은 제 손으로 탁 치며 말했다.


“뭐하냐?”

“야, 너 뭔 얼굴에 나뭇잎을 묻히고 다녀.”


석은 볼을 벅벅 문질렀다. 얇은 갈색 나뭇잎 쪼가리가 손끝에 만져졌다. 기정이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말했다.


“석아, 사람들이 다 보는데?”


기정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모여든 사람들과 경찰관들이 둘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보석은 재빨리 기정의 멱살을 붙들어 그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다음에, 옆으로 비켜 기정을 앉혔다. 경찰이 보지 못하게 기정이 그들을 등지는 방향으로 일으킨 건 덤이었다. 석은 거칠게 멱살을 잡고 기정을 흔들었다.


“빨리 설명하라고, 김기정.”

“석아,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엽서를 보내지 말든가.”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야! 그냥 엽서 받고 무시하면 되는데, 왜 자꾸 오는 거냐? 너 그런 거 잘하잖아.”

“그거 욕이냐?”

“생각을 해봐라. 오늘 평일인데 너 학교는 어쩌고 여기 와있냐? 무작정 표 끊고 온 거 아냐?”

“남……. 친, 친구가 실종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데,”

“이제는 너 전에 있었던 일 다 기억하잖아, 지난번과 다르게. 그럼 나 안 죽은 것도 알잖아.”


석은 기정과의 대화에서 피곤이 쏟아지는 걸 느꼈다. 정말 갑자기, 석은 울고 싶어졌다. 손끝에 묻어나오는 눈물을 통해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너 울어?”

“야, 김기정.”

“왜.”

“나 너랑 9년 넘게 사겼었다. 너는 씨발, 나한테 안 미안하냐?”

“…….”


기정은 한참 말없이 앉아있었다. 석은 어느새 힘이 풀려 멱살 쥔 손을 내려놓았다. 다시 시작된 경전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기정이 천천히 입을 뗐다.


“너랑 헤어지고, 난 항상 여행을 떠나.”

“그건 알아, 새끼야.”

“아니, 말 끊지 말고 들어봐.”


꿉꿉하고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기정은 넘어져 까진 석과 자신의 손마디를 흘끗 보았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난 인천공항에서부터 질질 울면서 여행을 떠나고, 항상 휴대폰을 중간에 잃어버려서 가족에게 연락을 못 해. 그래서 난 실종신고가 되고, 넌 그런 나를 찾아와. 내가 세기로는 지금까지 수십 번이 넘었어. 그리고 난, 휴대폰을 잃어버리기 전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꼭 너에게 엽서를 써.”

“그게 그, 오지 말라는…….”

“아마 맞을걸. 내가 한번 꺼지라고도 보냈던 거 같은데, 뭐 아무튼.”

“어, 그렇게 보낸 엽서도 봤다.”

“그리고 넌 나를 찾아내고, 내가 안 죽은 걸 알아서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이 뒤가 있었단 말야?”

“그리고 끝. 우리 재결합도 안 하고 그냥 그러고 끝나.”


석은 기정에게서 고개를 돌려 아래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서,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 거냐, 김기정. 기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딱 한 번 내가 엽서를 쓰고 나서 다음날 우연히 부치지 않은 적이 있었어.”

“…….”

“그러니까, 이 운명에서 살짝 비켜 나간 날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자 너는 나를 찾지 않았고, 나는 여행을 계속하거든. 그러다가 독일에서 내가 좋아하던 작가를 만나서,”

“그래서.”

“사겨, 그 사람이랑. 그리고 거기서 이 여행을 바탕으로 작업을 하고, 그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전시에 올라가게 되거든.”

“요점이 뭐냐.”

“요점이라기보다는…, 나 여태껏 죽은 적도, 위험한 적도 없었는데.”


기정은 잠시 뜸을 들였다. 어느새 해는 밝게 떠오른 지 오래였다.


“그냥 거기서 1년 정도 살다가, 죽더라고. 교통사고였는지, 뭐였는지는 마지막 순간에 잘 못 봐서 모르겠어.”

“뭐?”

“그리고 눈 뜨니까 다시 너랑 헤어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고…….”

“죽는다고?”

“아, 어. 그러니까, 너랑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난 죽는, 뭐 그런 건가 봐.”


석은 고개를 들어 기정을 바라보았다. 결론은 정해졌다.


“그럼 답은 하나네. 가자, 빨리. 오늘 당장 출발하면 학교는 징계만 당하고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기정은 석의 말을 듣자마자 손을 내저었다.


“석아, 내가 왜 자꾸 너를 물에 처 빠뜨린 지 모르겠냐?”

“뭐?”

“띨빡아, 넌 물에 빠지면 처음부터 다시 돌아가야 했잖아.”

“그래, 그래서 내가 너 때문에 온갖 더러운 물에 다 빠졌다. 돌아가서 약값 청구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

“난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지 않아.”


황보석은 김기정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 기정은 스스로 1년 살다가 죽는 시한부 인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기정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이, 신이나 운명 그런 거라면, 난 차라리 안 할래.”

“그럼 죽는다면서.”

“보석아.”


기정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삶에서 난 정말 행복했거든.”


석은 재빠르게 쏘아붙였다.


“나랑 만났을 때 그렇게 불행했냐? 아, 우리 부모님한테 말도 못하니까? 내가 존나 예민하게 구니까 불편했냐? 그래, 거기서는 사방팔방 말하고 다니니 행복했겠지. 난 너랑 있을 때, 행복했어. 그러니까 내가, 내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를 미쳤다고 무단결근 때려가며 너를 찾으러 오겠냐? 이기적인 새끼, 그럼 가지마. 가지 말고 독일인지 프랑스인지 가서 차에 치여 죽든가.”


기정은 까져서 피가 나는 석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너는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래서 기어이 괌에 가서, 한국에서 인증도 안 되는 혼인신고서를 찍어 오더라고. 너, 곧 너희 부모님한테도 말하던데.”

“뭐?”

“보석아, 너 은근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니까. 그래서 내가 너랑 있을 때도 그렇게 좋았나 봐.”


기정과 석의 두 눈이 마주쳤다. 어디선가 또 다른 오열 소리와 함께 화장터에서 나온 연기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다시 하나의 죽음이 강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기정이 말했다.


“만약에, 내가 살아서 너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안 만나. 끝은 끝이잖아. 그리고 난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미래를 포기하는 거라고.”

“그 대신에 죽잖아, 미친 새끼야. 너는 죽고 싶어? 아저씨랑 아줌마 생각 안 해?”

“안 죽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난 그 전시에 내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거야. 그 경험을 꼭 다시 하고 싶어.”

“…….”

“그래서 죽는다면, 그것마저 내 인생 아니겠냐.”


석은 기정의 말을 곱씹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주위에서 나는 종소리와 경전소리, 자동차소리만이 둘 사이를 메꾸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석이 입을 열었다. 


“야 김기정.”

“왜.”

“그 작품, 맘에 드냐?”

“완전. 내 역작이야, 인마. 너도 한국에서 봤다고 나한테 연락 남기더라.”


석은 강을 보았다. 힌두교의 성스러운 강,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강,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일부, 죽음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삶, 그럼에도 우리가 원하는 길을 걷는다면, 행복하다면…. 관광객들이 떠들면서 다가와 향로에 새 향을 꽂았다. 향 내음이 멀리 퍼졌다. 석은 기정의 옆얼굴을 보았다. 기정을 좋아했던 이유는, 기정의 살 내음을 맡았던 이유는, 기정의 콧대와 코와 찡그린 코, 입술, 담배 내음, 눈, 약간 낮은 목소리와 달리던 모습, 공을 건네던 모습, 팔뚝, 물로 안 지워지는 물감을 얼굴에 묻히고 웃던 기정, 공소리, 석의 코끝에서 바스락거리는 검고 짧은 머리카락, 음악에 맞춰 웃기게 석과 춤을 추는 기정, 그리고 그림을 보는 기정의 모습이 행복한 기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기정이 행복하면, 석은 기정을 사랑했다. 기정이 눈물을 흘리며 저와의 카톡 대화를 볼 때, 석은 그다지 즐겁지도, 사랑을 느끼지도 않았다. 석은 기정이 행복하기를 원했다. 기정이 석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것도, 먹지 못하는 것들을 먹는 모습도, 보지 않는 걸 보는 모습도 사랑하는 모습도 기정을 행복하게 했기에 석은 기정을 사랑했고, 기정과의 연애를 사랑했고, 기정을 꽤 좋아했다. 김기정은 행복하면 사랑스러웠다. 황보석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황보석은 김기정을 사랑했다.

석은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난 석을 보며 기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냐?”


석은 강을 등지고 섰다. 바람이 불어왔다. 해가 반사된 그의 안경은 닦지 못한지 좀 되었는지, 지문 자국투성이였다. 기정이 제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너를 데리고 한국에 가는 게 운명인 거 같은데,”

“…….”

“난 운명 안 믿어. 너도 알잖아.”


기정이 부시는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눈물이 흐르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석은 했다. 김기정은 코를 찌푸리며 웃기게 웃을 때, 인물이 훨 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기정아, 나를 막아.”


석이 말했다.


“그 대신에 너 장례는 아저씨 아줌마 생각해서 무조건 한국에서 치를 테니, 알아서 해라. 예온이랑 호진이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기정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기정은 석에게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석은 눈을 감고 곧 뒤통수에 마주할 갠지스 강의 뜨뜻미지근한 물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느낀 건, 백구십오의 제 코에 부슬부슬 마주하는 까만 머리카락, 따뜻하지만 단단한 허리, 드러난 맨살은 차가운 팔, 담배냄새, 눈을 뜨니 마주하는 기정의 눈, 그리고 작게 부딪혀 오는 기정의 입술이었다. 석은 고개를 내려 기정의 따뜻하고 차이 맛이 나는 입술을 조심히 삼켰다. 느릿하고 눈이 부신 키스였다. 살살 윗니로 기정의 아랫입술을 물자, 기정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다시금 입술을 물자 기정이 좀 더 얼굴을 들어 맞춰왔다. 기정이 석의 앞니를 하나둘 훑고는 둘은 두어 번의 버드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김기정.”


석이 말했다. 기정은 눈 부신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밝게 빛나 보였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석아, 내가 이 여행을 잊지 않게 해.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운명 따위 안 믿는 게 너잖아.”

“대신에 너 나 학교 잘리면 재산 상속시켜라.”


기정은 코를 찌푸리며 하하 웃었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사랑했다.


“너한테 반절 줄게.”


기정이 말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와 닿았다. 석은 문득, 이제야 정말 길고 단 잠이 들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려다본 기정의 삐죽한 머리카락은 고요하고 조용한 밤과 잠처럼 까만색이었다.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그럼 나도.”


사랑한다.


귓가에 먹먹하게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은 갠지스 강의 물이 제 뒤통수에 닿는 걸 느꼈다. 언제나 그다지 좋은 감각은 아니었다. 찝찔한 물이 코와 입에 흘러들어왔다. 갠지스 강의 위생상태에 대한 유튜브를 무시하는 건 꽤 일이었다. 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깊고, 조용하고, 푹신하고, 따뜻하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황보석이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 해를 맞으며 눈을 떴을 때에는, 그의 휴대폰에 김영인씨의 통화기록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석은 괜찮았다. 좋았다. 오랜만에, 개꿀잠을 잤으니까 말이다.



***



석은 뉴욕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몰랐다. 그의 관절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소리 지르고 있었다. 농구선수로는 작은 키였다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황보석은 꽤 큰 키였다. 석은 김영인으로부터 기정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받아서, 기정의 친구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난 3월 8일, 김기정 작가가 세상을…, 까지 치고서는 석은 극심한 피로감과 뻐근한 목 통증을 느꼈다. 한참을 울던 기정의 애인은 수염에 옅은 침 자국을 남기면서 자고 있었다. 제 옆에 앉은 김영인 역시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석은 영어로 쓸 말은 기정의 애인, 에즈라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진장 힘들었다. 역시! 영인 아저씨는 이래서 나한테도 상주를 부탁한 거구나. 자기가 너무 힘드니까! 석은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정말이지 피곤했다. 저기 어디 화물칸에 실려있을 작아진 기정을 생각하니, 그래도 여기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까지 도착하기에는 아직 열두 시간이 넘게 남았다. 한숨 자고 써도 괜찮았다. 어차피 내리면 삼사일은 잠도 못 자고 피곤하게 있어야 했다. 연차를 싹싹 빌어서 쓰기도 했고, 여러모로 배려해준 덕에 발인까지는 학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석은 휴대폰을 끄고, 손을 뻗어 독서등을 껐다. 목을 천천히 비행기 좌석에 뉘였다. 조용한 기내에서 졸음이 조금씩 밀려왔다. 눈을 감았다. 잠이 쏟아졌다. 상상도 환상도 공상도 망상도 몽상도 아닌 꿈이 펼쳐졌다. 검은 시야가 점차 꿈의 색 모를 시야로 바뀌었다. 김기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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