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익명
Role:
Novel
헤어진 연인이 뜬금없이 거실 한 가운데에 나타난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오퍼시티 40% 정도의 반투명의 상태로. 그것은 기정과 석이 헤어진 지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꾸물대는 하늘에서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은 연신 얼굴을 때렸다. 석은 잰걸음으로 건물 안에 몸을 들였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붓듯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가 뒤를 이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석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간신히 비를 피한 덕에 젖은 곳은 한군데도 없었음에도 물을 먹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현관에서 거실 복도로 이어지는 센서등에 차례로 불이 켜지자 어두웠던 집 안에 빛이 들었다. 석은 환기를 위해 반쯤 열어놓은 창문을 향해 급하게 팔을 뻗었다. 들이친 빗방울이 거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센서등이 꺼지면서 집 안에 어둠이 내려앉자 석의 등 뒤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뒤돌아보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던데. 현실성 없는 생각에 고개를 털고 뒤를 돌아선 석은 다른 의미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숨을 멈췄다.
"김기정....?"
그것을 기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나? 처음 기정이 나타나던 밤 석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목도하고 한참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고정됐다. 혹시나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제 눈이 착시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싶어 집 안의 모든 불을 밝혔으나 외부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기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듯 태연하게 수건을 집어 든 기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벽지무늬가 그대로 비쳐 보였다. 마치 홀로그램을 재생시킨 것처럼 기정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털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정은 석의 부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허공을 향하는 시선은 번번히 석을 비껴갔다. 마치 그것에게는 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걸 환영이라고 해야하나. 피로 탓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 순간 떠나간 연인을 부르짖는 드라마 속 한 장면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에 석은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로 평생을 보내온 그에게 그런 종류의 비일상에 대처하는 해결책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석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번호판에 기정의 번호를 입력하며 석은 기정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점차 휴대폰을 쥔 손이 축축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통화 연결음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를 몇번 쯤,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석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황보석은 소리친다. 야, 김기정. 넌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냐. 얼마간의 안도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그리고 반쯤은 누구라도 이해하지 못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머쓱함이 뒤섞인 채로.
“...석아, 너 술마셨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기정이 불쑥 그렇게 물어왔을 때 석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차라리 취한거 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석은 너무도 멀쩡했고 뒤늦게 뻘쭘함이 몰려왔다. 그러는 순간에도 기정의 환영은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거 아냐.”
“그럼 왜 전화했는데.”
하기야 한참 전에 헤어진 전남자친구가 늦은 밤 연락하는건 아무래도. 그래, 좀 그렇긴 하지.
“너... 요새 혹시 뭐 별일 없지?”
순간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해 기정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네 환영을 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석은 당장에 전화를 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김기정이라면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도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뭔소리야.”
석이 망설이는 사이, 어쩐지 골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건데. 자니, 그런거 할 생각이면 집어 치우고. 나 전 남친이랑 섹파같은거 할 생각없어.”
“뭐? 야, 그런거 아니야.”
“하긴... 황보석 너는 그러면 안되지.”
술간 울컥했다.
“너야말로 혹시라도 딴생각 하지 마라.”
“딴생각을 내가 하냐? 이 시간에 전화한 사람이 누군데. 미리 말하는데 괜히 찔러볼 생각이면 관두라는 거지.”
“찔러, 야, 내가 지금 너 찔러보려고 연락했다고?”
“그러면 이 밤에 갑자기 연락해서 성질내는 이유가 뭔데.”
또 시작이다. 석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둘은 그런 의미없는 싸움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별일 없는 거면 됐어.”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석은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었다.
근데. 안될 건 또 뭔데.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헤어지자는 말에 미련 없이 쿨하게 돌아선건 김기정 본인이었으면서. 그보다 사귀니 마니 이전에 우리가 친구로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살짝 섭섭해졌다. 헤어지고 나면 원래 다 이런건가.
황보석 너는 그러면 안되지. 기정의 날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잠깐이지만 기정을 걱정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석은 거칠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어버렸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농구를 하며 친구로 지내기를 수 년,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기정의 진로 이탈로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도 섞지 않는 시기를 보내던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 보장된 미래를 쉬이 던져버린 채 늦은 나이에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겠다는 기정을 석은 이해하지 못하고 기정에게 투영된 자신의 미래 마저도 의심하게 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의외로 기정은 새로운 길에 무난히 적응했고 같은 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계기로 부쩍 가까이 지내다가... 낭만, 그래 그게 문제였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인간으로 항상 뇌에 힘 꽉 주고 살아가던 황보석이 기정의 낭만에 홀려버렸다. 세상 어디에도 메인 바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던 기정의 낭만은 석에게 처음에는 일탈, 어느 순간에는 자유, 그리고 끝내는 갈망이 되어갔다. 석의 갈망이 기정을 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정의 낭만은 기정 그 자체였으므로. 어느 날엔가는 입을 맞추고, 그러다가 몸을 섞고, 고지식한 석은 큰 결심 끝에 기정에게 고백했다. 야, 김기정. 우리 사귈래? 답잖게 긴장하는 석을 보며 기정은 웃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된 이들이 으레 그렇듯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잘 맞았고, 동시에 너무 잘 알기에 안맞았다. 서로의 취향이나 습관들을 알고 있어 구태여 맞추지 않아도 맞아들어가는 부분이 있는 반면, 서로의 단점들도 너무 잘 알았기에 종종 다투고 실망했다. 그렇게 석과 기정은 이 년쯤 연인으로 지냈다. 그래도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 생각했다.
이별은 갑작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친구라는 정체성보다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아갈 즈음이었다. 대학교 막학기 석은 임용을 준비하느라 한참을 예민해져 있었고, 기정은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둘은 여전히 연인이었고 석은 기정을 좋아했다. 그때쯤 기정은 석의 자취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인간과 미래를 보는 인간은 끝내 섞일 수 없는 것이었을까. 문제는 또다시 그놈의 좆같은 낭만이었다.
석아, 날도 좋은데 꽃구경이라도 갔다오자. 안돼, 나 올해 시험 무조건 붙어야 돼. 시험이 연말인데 벌써부터 집에만 꽁꽁 박혀있을거야? 내 졸작이 그것보다 먼저인데도? 그러니까 올해는 좀 자중하자는 거지. 황보석 너는 왜 그렇게 인생을 퍽퍽하게 사냐.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어.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끝에 이기는 쪽은 때로는 석이었고 때로는 기정이었다. 이성과 낭만의 대립이란 언제나 그러하듯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틈을 자꾸만 벌려놓았다. 하루 빨리 시험을 통과해 기정과의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는 석의 바람과 매순간 석과의 행복을 찾고 싶어하던 기정은 자주 다퉜고 반복되는 싸움은 석을 지지리도 못난 인간으로 만들고 난 후에야 끝이 났다. 지리한 다툼 끝에 꺼내어진 헤어지자는 석의 말을 기정은 산뜻하게 수용했다. 내 물건들은 너가 알아서 처리해. 끝은 퍽 간단했다.
친구끼리의 연애라는 것은 결국 친구도 잃고 사랑도 잃는 채로 끝이 난다는 것을 석은 기정과의 연애를 통해 알게됐다. 그렇게 기정과 헤어지고 반년이 흘렀다.
오랜만의 기정과의 통화는 석을 지난 연애의 순간으로 잠시 데려다 놓았다. 조금은 지겹고, 또 조금은 반가운. 전화를 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석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나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 느리게 옷을 찾아입은 기정의 형상은 조용히 침대로 향해있었다. 괜히 짜증이 나 가만히 잠든 기정을 내려다 보았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놔. 손을 들어 기정의 몸에 가져다 대자 기정의 몸을 통과한 석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코 밑에 대보아도 숨결이 전해오는 일은 없었다. 제 앞에 나타난 기정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 명명해야할까.
비어있는 침대의 반대편에 몸을 누이며 석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잠이 들면 지독한 가위에 눌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갔으나 기정이라면 자신을 괴롭힐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형태의 김기정도 황보석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두려웠던 순간은 마지막을 고하는 석의 말에 기정이 고민없이 뒤돌아서던 그때 뿐이었다. 기정은 언제나처럼 간간히 몸을 뒤척이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기정을 닮은 형상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석의 집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잠시 피로했던 탓에 착각을 했다거나 간밤의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음 날 아침 거실 쇼파 위에 늘어져 스케치북에 낙서를 끄적이는 기정을 본 순간 사라졌다. 나른하게 누운 기정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일상을 함께하던 시절의 그것이었다. 석은 문득 그런 뜬금없는 등장마저도 기정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저걸 어떻게 해야하나. 석은 임용시험을 마치고 결과발표만을 남긴 상황이었다. 가끔 몸이 쑤시면 운동을 하거나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기에 자연스레 기정의 형상과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것이 특별히 석을 괴롭히거나 해를 가하는 일은 없었으나 적어도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을 보고 있으면 기정과 만나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쩐지 기정의 형상과 함께하는 시간이 익숙해질수록 배어나오는 후회가 짙어졌다. 석은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조금 인정했다. 자신은 기정을 그리워한다.
동시에 며칠 전 들었던 기정의 냉랭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석은 자신도 모르게 몇 번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내려놓았다.
“허... 그거 진짜 신기하네요.”
햄버거를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언을 보며 불가사의한 상황을 토로할 대상으로 그를 택한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석은 잠시 고민했다. 석이 처음 고민상담의 대상으로 떠올린 것은 동갑내기 친구들인 예온이나 호진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꿈만 같은 상황을 그 아이들이 믿어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적어도 상언은 머릿속이 투명한 인간이니 제가 어떤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석은 상언을 불러냈다. 예상대로 상언은 석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 주었다. 다만 석이 간과한 것이라면,
“원한 같은거 아닐까요? 왜 공포 영화 같은거 보면...”
“야 상언아. 아무리 그래도 김기정이랑 내가 원한까지 쌓일 사이는 아니지.”
상언에게서 도움이 될만한 답변을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석은 상언의 이야기를 한귀로 흘리며 먹지도 않을 감자튀김을 뒤적였다.
“그런가요? 하긴... 형님들 헤어졌다고 했을 때도 의외긴 했어요. ”
“왜?”
“그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아보였으니까? 솔직히 두 분 엄청 다른 스타일인 것 같아보이는데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어요?”
석은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다같이 만났던 상언의 작년 생일을 떠올렸다. 석이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에 들어가기 전 오랫만에 다같이 한번 얼굴이나 보자며 어렵사리 모은 자리였다. 그때 석은 상언이 좋아하던 프로팀 유니폼을 선물했고 기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며 그림... 잠깐만 그림?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어 석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 사이 상언은 제 몫의 햄버거를 해치운 뒤 석이 뒤적이던 감자튀김에 손을 뻗었다.
“근데 진짜로 왜 헤어지신거에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정과 헤어진 뒤 그 이유를 묻는 질문들에 석은 한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역시도 정확한 헤어짐의 이유를 정의내리기 힘들었다. 석에게 기정은 너무도 뜨겁고 그러면서도 가벼웠다. 그런 기정을 언제까지고 붙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은 안정된 현실에 속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석을 채찍질했던 것도 같고.
“그냥. 걔랑 나랑 좀 안맞는거 같아서.”
“뭐... 기정이 형님도 좀 독특한데가 있는 분이긴 했죠.”
상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아니면 그런건 아닐까요? 제가 최근에 본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잠시간 골몰하던 석은 상언의 이야기에 현실로 돌아왔다. 상언이 독서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상언을 알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상언이 너 요새 책도 읽냐.”
“아 그게, 사실은 만화책입니다.”
상언이 천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거기에 보면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미련이 인간이 되어서 나타나가지고 여러가지 사건들이 생겨나는 에피소드가 있거든요? 어쩌면 그런건 아닐까요? 해결 못한 감정 그런거 있잖아요.”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라. 기정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석은 시험을 핑계삼아 기정과의 이별을 마음 한구석에 밀어둔 채 슬픔도 분노도 나중으로 미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자 파도처럼 몰려온 감정의 범람에 한동안 애를 먹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기정은, 너무도 쉽게 헤어짐을 인정하고 그 후 퍽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보였다. 애당초 둘의 관계에 기정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을까 하는 의문은 얼마간 석을 괴롭혔다. 기정을 좋아했던건 자신 뿐이고 김기정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주었던 것은 아닐까. 석은 한없이 바람같은 기정을 떠올린다. 현실에 두 다리를 단단히 박아넣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인 김기정이라면, 자신과 만나고 헤어지던 사건도 흘러가는 하나의 사건이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제가 겪고 있는 현상은 상언의 가설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석은 착잡한 기분으로 여전히 신나게 떠들고 있는 상언을 응시했다.
집으로 돌아온 석은 습관처럼 기정의 형상을 찾았다. 그것은 주로 기정이 좋아하던 창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쇼파에 늘어지듯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곤 했다. 그날 역시 기정은 쇼파에 앉아 빈 도화지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 옆자리를 차지한 석은 기정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슬쩍 넘겨보았다.
문득, 기정의 손 끝에서 형태를 찾아가고 있는 그것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뚝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을 한 누군가의 얼굴. 살포시 덧대어진 안경...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언젠가 나누었던 기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김기정, 우리 좀 있으면 2주년인데 너 뭐 받고 싶은거 없어?'
'석아 너는 그걸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는거야? 하여간 무드 존나 없네.'
석은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었다.
'나는 벌써 정했는데. 석아 내가 너 요번에 진짜 제대로 각잡고 그려줄게.'
'그건 그냥 너 그림 연습하는거 아니냐.'
'뮤즈가 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줄 알지도 못하네. 내가 얼마나 영혼 갈아 넣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기정은 웃었던가. 그 눈빛이 너무도 진지해서 석은 그저 따라 웃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정과의 연애도 끝이나고 석은 끝내 기정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기정의 형상이 붙들고 있는 도화지에는 거의 완성된 석이 담겨있었다. 연필 끝이 스치는 순간 마다 석의 모습은 뚜렷해졌다. 한참을 쉬지 않고 덧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려내기를 반복하던 기정의 손이 어느 순간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도화지에 담긴 석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리고 기정은.
한참이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석은 기정을 올려다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김기정이 울고 있었다.
끝없는 다툼에도, 이별의 순간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김기정이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모여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참이나 울음을 멈출 줄 모르던 기정은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들고 석이 너무도 잘 아는 번호를 몇자리 쯤 누르다가 이내 지워냈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
문득 생각한다. 미련이라곤 없어보이던 기정의 뒷모습도, 헤어짐 이후에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만 같던 기정의 소식들도, 애정은 자신 뿐이었던 것만 같던 석의 오해들도. 어쩌면 그쪽이 환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석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언의 말처럼 제 눈앞에 놓인 형상이 누군가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라면. 석은 명명하지 못했던 존재에 이름 붙인다. 미련, 후회, 그리움, 그리고 석이 미처 보지 못했던 김기정의 감정들. 그러나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제게 닿지 못한 김기정의 낭만, 그래 아무래도 그런 이름이 제일 잘어울렸다.
석은 천천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역시나 그림은 실물로 보는 편이 제일 아름다울 것 같다. 석은 다시 한번 기정에게 홀려보기로 마음 먹는다. 통화연결음이 울리는 사이, 기정의 형상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헤어진 연인이 뜬금없이 거실 한 가운데에 나타난다면 그건 어떤 종류의 사건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오퍼시티 40% 정도의 반투명의 상태로. 그것은 기정과 석이 헤어진 지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꾸물대는 하늘에서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날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은 연신 얼굴을 때렸다. 석은 잰걸음으로 건물 안에 몸을 들였다. 자동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퍼붓듯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가 뒤를 이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석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간신히 비를 피한 덕에 젖은 곳은 한군데도 없었음에도 물을 먹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현관에서 거실 복도로 이어지는 센서등에 차례로 불이 켜지자 어두웠던 집 안에 빛이 들었다. 석은 환기를 위해 반쯤 열어놓은 창문을 향해 급하게 팔을 뻗었다. 들이친 빗방울이 거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센서등이 꺼지면서 집 안에 어둠이 내려앉자 석의 등 뒤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영화에서는 이럴 때 뒤돌아보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던데. 현실성 없는 생각에 고개를 털고 뒤를 돌아선 석은 다른 의미의 비현실적인 광경에 숨을 멈췄다.
"김기정....?"
그것을 기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나? 처음 기정이 나타나던 밤 석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목도하고 한참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고정됐다. 혹시나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제 눈이 착시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싶어 집 안의 모든 불을 밝혔으나 외부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기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듯 태연하게 수건을 집어 든 기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벽지무늬가 그대로 비쳐 보였다. 마치 홀로그램을 재생시킨 것처럼 기정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털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정은 석의 부름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허공을 향하는 시선은 번번히 석을 비껴갔다. 마치 그것에게는 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걸 환영이라고 해야하나. 피로 탓에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 순간 떠나간 연인을 부르짖는 드라마 속 한 장면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이었을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에 석은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로 평생을 보내온 그에게 그런 종류의 비일상에 대처하는 해결책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석은 조심스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번호판에 기정의 번호를 입력하며 석은 기정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날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점차 휴대폰을 쥔 손이 축축해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통화 연결음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를 몇번 쯤,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을 때 석은 자기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황보석은 소리친다. 야, 김기정. 넌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냐. 얼마간의 안도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그리고 반쯤은 누구라도 이해하지 못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머쓱함이 뒤섞인 채로.
“...석아, 너 술마셨냐?”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기정이 불쑥 그렇게 물어왔을 때 석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차라리 취한거 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석은 너무도 멀쩡했고 뒤늦게 뻘쭘함이 몰려왔다. 그러는 순간에도 기정의 환영은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거 아냐.”
“그럼 왜 전화했는데.”
하기야 한참 전에 헤어진 전남자친구가 늦은 밤 연락하는건 아무래도. 그래, 좀 그렇긴 하지.
“너... 요새 혹시 뭐 별일 없지?”
순간적으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해 기정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네 환영을 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석은 당장에 전화를 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김기정이라면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도 진지하게 들어줄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뭔소리야.”
석이 망설이는 사이, 어쩐지 골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건데. 자니, 그런거 할 생각이면 집어 치우고. 나 전 남친이랑 섹파같은거 할 생각없어.”
“뭐? 야, 그런거 아니야.”
“하긴... 황보석 너는 그러면 안되지.”
술간 울컥했다.
“너야말로 혹시라도 딴생각 하지 마라.”
“딴생각을 내가 하냐? 이 시간에 전화한 사람이 누군데. 미리 말하는데 괜히 찔러볼 생각이면 관두라는 거지.”
“찔러, 야, 내가 지금 너 찔러보려고 연락했다고?”
“그러면 이 밤에 갑자기 연락해서 성질내는 이유가 뭔데.”
또 시작이다. 석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둘은 그런 의미없는 싸움을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별일 없는 거면 됐어.”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에 석은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었다.
근데. 안될 건 또 뭔데.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헤어지자는 말에 미련 없이 쿨하게 돌아선건 김기정 본인이었으면서. 그보다 사귀니 마니 이전에 우리가 친구로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살짝 섭섭해졌다. 헤어지고 나면 원래 다 이런건가.
황보석 너는 그러면 안되지. 기정의 날선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되풀이된다. 잠깐이지만 기정을 걱정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석은 거칠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어버렸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농구를 하며 친구로 지내기를 수 년,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기정의 진로 이탈로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도 섞지 않는 시기를 보내던 때도 있었다. 나름대로 보장된 미래를 쉬이 던져버린 채 늦은 나이에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겠다는 기정을 석은 이해하지 못하고 기정에게 투영된 자신의 미래 마저도 의심하게 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의외로 기정은 새로운 길에 무난히 적응했고 같은 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계기로 부쩍 가까이 지내다가... 낭만, 그래 그게 문제였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인간으로 항상 뇌에 힘 꽉 주고 살아가던 황보석이 기정의 낭만에 홀려버렸다. 세상 어디에도 메인 바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던 기정의 낭만은 석에게 처음에는 일탈, 어느 순간에는 자유, 그리고 끝내는 갈망이 되어갔다. 석의 갈망이 기정을 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정의 낭만은 기정 그 자체였으므로. 어느 날엔가는 입을 맞추고, 그러다가 몸을 섞고, 고지식한 석은 큰 결심 끝에 기정에게 고백했다. 야, 김기정. 우리 사귈래? 답잖게 긴장하는 석을 보며 기정은 웃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된 이들이 으레 그렇듯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잘 맞았고, 동시에 너무 잘 알기에 안맞았다. 서로의 취향이나 습관들을 알고 있어 구태여 맞추지 않아도 맞아들어가는 부분이 있는 반면, 서로의 단점들도 너무 잘 알았기에 종종 다투고 실망했다. 그렇게 석과 기정은 이 년쯤 연인으로 지냈다. 그래도 나름대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 생각했다.
이별은 갑작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오랜 시간 익숙했던 친구라는 정체성보다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아갈 즈음이었다. 대학교 막학기 석은 임용을 준비하느라 한참을 예민해져 있었고, 기정은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둘은 여전히 연인이었고 석은 기정을 좋아했다. 그때쯤 기정은 석의 자취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인간과 미래를 보는 인간은 끝내 섞일 수 없는 것이었을까. 문제는 또다시 그놈의 좆같은 낭만이었다.
석아, 날도 좋은데 꽃구경이라도 갔다오자. 안돼, 나 올해 시험 무조건 붙어야 돼. 시험이 연말인데 벌써부터 집에만 꽁꽁 박혀있을거야? 내 졸작이 그것보다 먼저인데도? 그러니까 올해는 좀 자중하자는 거지. 황보석 너는 왜 그렇게 인생을 퍽퍽하게 사냐.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렇게 현실감각이 없어.
그렇게 한참의 실랑이 끝에 이기는 쪽은 때로는 석이었고 때로는 기정이었다. 이성과 낭만의 대립이란 언제나 그러하듯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틈을 자꾸만 벌려놓았다. 하루 빨리 시험을 통과해 기정과의 미래를 준비하고 싶다는 석의 바람과 매순간 석과의 행복을 찾고 싶어하던 기정은 자주 다퉜고 반복되는 싸움은 석을 지지리도 못난 인간으로 만들고 난 후에야 끝이 났다. 지리한 다툼 끝에 꺼내어진 헤어지자는 석의 말을 기정은 산뜻하게 수용했다. 내 물건들은 너가 알아서 처리해. 끝은 퍽 간단했다.
친구끼리의 연애라는 것은 결국 친구도 잃고 사랑도 잃는 채로 끝이 난다는 것을 석은 기정과의 연애를 통해 알게됐다. 그렇게 기정과 헤어지고 반년이 흘렀다.
오랜만의 기정과의 통화는 석을 지난 연애의 순간으로 잠시 데려다 놓았다. 조금은 지겹고, 또 조금은 반가운. 전화를 끊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석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나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사이 느리게 옷을 찾아입은 기정의 형상은 조용히 침대로 향해있었다. 괜히 짜증이 나 가만히 잠든 기정을 내려다 보았다. 이건 대체 어디서 나타나서 사람 속을 뒤집어놔. 손을 들어 기정의 몸에 가져다 대자 기정의 몸을 통과한 석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코 밑에 대보아도 숨결이 전해오는 일은 없었다. 제 앞에 나타난 기정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 명명해야할까.
비어있는 침대의 반대편에 몸을 누이며 석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잠이 들면 지독한 가위에 눌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갔으나 기정이라면 자신을 괴롭힐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형태의 김기정도 황보석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유일하게 두려웠던 순간은 마지막을 고하는 석의 말에 기정이 고민없이 뒤돌아서던 그때 뿐이었다. 기정은 언제나처럼 간간히 몸을 뒤척이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기정을 닮은 형상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석의 집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잠시 피로했던 탓에 착각을 했다거나 간밤의 꿈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음 날 아침 거실 쇼파 위에 늘어져 스케치북에 낙서를 끄적이는 기정을 본 순간 사라졌다. 나른하게 누운 기정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일상을 함께하던 시절의 그것이었다. 석은 문득 그런 뜬금없는 등장마저도 기정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저걸 어떻게 해야하나. 석은 임용시험을 마치고 결과발표만을 남긴 상황이었다. 가끔 몸이 쑤시면 운동을 하거나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기에 자연스레 기정의 형상과 함께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그것이 특별히 석을 괴롭히거나 해를 가하는 일은 없었으나 적어도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을 보고 있으면 기정과 만나던 시절이 떠올랐다. 어쩐지 기정의 형상과 함께하는 시간이 익숙해질수록 배어나오는 후회가 짙어졌다. 석은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스스로를 조금 인정했다. 자신은 기정을 그리워한다.
동시에 며칠 전 들었던 기정의 냉랭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석은 자신도 모르게 몇 번쯤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내려놓았다.
“허... 그거 진짜 신기하네요.”
햄버거를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상언을 보며 불가사의한 상황을 토로할 대상으로 그를 택한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석은 잠시 고민했다. 석이 처음 고민상담의 대상으로 떠올린 것은 동갑내기 친구들인 예온이나 호진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꿈만 같은 상황을 그 아이들이 믿어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적어도 상언은 머릿속이 투명한 인간이니 제가 어떤 공상과학 같은 이야기를 해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석은 상언을 불러냈다. 예상대로 상언은 석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어 주었다. 다만 석이 간과한 것이라면,
“원한 같은거 아닐까요? 왜 공포 영화 같은거 보면...”
“야 상언아. 아무리 그래도 김기정이랑 내가 원한까지 쌓일 사이는 아니지.”
상언에게서 도움이 될만한 답변을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석은 상언의 이야기를 한귀로 흘리며 먹지도 않을 감자튀김을 뒤적였다.
“그런가요? 하긴... 형님들 헤어졌다고 했을 때도 의외긴 했어요. ”
“왜?”
“그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만나고 있는 것 같아보였으니까? 솔직히 두 분 엄청 다른 스타일인 것 같아보이는데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았어요?”
석은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다같이 만났던 상언의 작년 생일을 떠올렸다. 석이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에 들어가기 전 오랫만에 다같이 한번 얼굴이나 보자며 어렵사리 모은 자리였다. 그때 석은 상언이 좋아하던 프로팀 유니폼을 선물했고 기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며 그림... 잠깐만 그림?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한 기분이 들어 석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 사이 상언은 제 몫의 햄버거를 해치운 뒤 석이 뒤적이던 감자튀김에 손을 뻗었다.
“근데 진짜로 왜 헤어지신거에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정과 헤어진 뒤 그 이유를 묻는 질문들에 석은 한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역시도 정확한 헤어짐의 이유를 정의내리기 힘들었다. 석에게 기정은 너무도 뜨겁고 그러면서도 가벼웠다. 그런 기정을 언제까지고 붙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은 안정된 현실에 속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석을 채찍질했던 것도 같고.
“그냥. 걔랑 나랑 좀 안맞는거 같아서.”
“뭐... 기정이 형님도 좀 독특한데가 있는 분이긴 했죠.”
상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퍼뜩 떠올랐다는 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아니면 그런건 아닐까요? 제가 최근에 본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잠시간 골몰하던 석은 상언의 이야기에 현실로 돌아왔다. 상언이 독서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상언을 알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상언이 너 요새 책도 읽냐.”
“아 그게, 사실은 만화책입니다.”
상언이 천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거기에 보면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미련이 인간이 되어서 나타나가지고 여러가지 사건들이 생겨나는 에피소드가 있거든요? 어쩌면 그런건 아닐까요? 해결 못한 감정 그런거 있잖아요.”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라. 기정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석은 시험을 핑계삼아 기정과의 이별을 마음 한구석에 밀어둔 채 슬픔도 분노도 나중으로 미뤘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자 파도처럼 몰려온 감정의 범람에 한동안 애를 먹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기정은, 너무도 쉽게 헤어짐을 인정하고 그 후 퍽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보였다. 애당초 둘의 관계에 기정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을까 하는 의문은 얼마간 석을 괴롭혔다. 기정을 좋아했던건 자신 뿐이고 김기정은 그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주었던 것은 아닐까. 석은 한없이 바람같은 기정을 떠올린다. 현실에 두 다리를 단단히 박아넣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인 김기정이라면, 자신과 만나고 헤어지던 사건도 흘러가는 하나의 사건이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제가 겪고 있는 현상은 상언의 가설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석은 착잡한 기분으로 여전히 신나게 떠들고 있는 상언을 응시했다.
집으로 돌아온 석은 습관처럼 기정의 형상을 찾았다. 그것은 주로 기정이 좋아하던 창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쇼파에 늘어지듯 앉아 무언가에 골몰하곤 했다. 그날 역시 기정은 쇼파에 앉아 빈 도화지에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가만히 그 옆자리를 차지한 석은 기정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슬쩍 넘겨보았다.
문득, 기정의 손 끝에서 형태를 찾아가고 있는 그것이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뚝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을 한 누군가의 얼굴. 살포시 덧대어진 안경...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는 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언젠가 나누었던 기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김기정, 우리 좀 있으면 2주년인데 너 뭐 받고 싶은거 없어?'
'석아 너는 그걸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는거야? 하여간 무드 존나 없네.'
석은 머쓱하게 뒷통수를 긁었다.
'나는 벌써 정했는데. 석아 내가 너 요번에 진짜 제대로 각잡고 그려줄게.'
'그건 그냥 너 그림 연습하는거 아니냐.'
'뮤즈가 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줄 알지도 못하네. 내가 얼마나 영혼 갈아 넣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기정은 웃었던가. 그 눈빛이 너무도 진지해서 석은 그저 따라 웃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정과의 연애도 끝이나고 석은 끝내 기정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기정의 형상이 붙들고 있는 도화지에는 거의 완성된 석이 담겨있었다. 연필 끝이 스치는 순간 마다 석의 모습은 뚜렷해졌다. 한참을 쉬지 않고 덧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려내기를 반복하던 기정의 손이 어느 순간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도화지에 담긴 석은 누구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리고 기정은.
한참이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석은 기정을 올려다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김기정이 울고 있었다.
끝없는 다툼에도, 이별의 순간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김기정이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서럽게 울었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모여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참이나 울음을 멈출 줄 모르던 기정은 옆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들고 석이 너무도 잘 아는 번호를 몇자리 쯤 누르다가 이내 지워냈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
문득 생각한다. 미련이라곤 없어보이던 기정의 뒷모습도, 헤어짐 이후에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만 같던 기정의 소식들도, 애정은 자신 뿐이었던 것만 같던 석의 오해들도. 어쩌면 그쪽이 환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석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언의 말처럼 제 눈앞에 놓인 형상이 누군가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라면. 석은 명명하지 못했던 존재에 이름 붙인다. 미련, 후회, 그리움, 그리고 석이 미처 보지 못했던 김기정의 감정들. 그러나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제게 닿지 못한 김기정의 낭만, 그래 아무래도 그런 이름이 제일 잘어울렸다.
석은 천천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역시나 그림은 실물로 보는 편이 제일 아름다울 것 같다. 석은 다시 한번 기정에게 홀려보기로 마음 먹는다. 통화연결음이 울리는 사이, 기정의 형상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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