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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의 기분을. 가슴께가 울렁거리고, 턱을 앙다물게 되던 순간을. 왜 그렇게까지 불쾌했던 걸까?

낯설음이라는 말도, 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어린애에게는 낯간지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서로에 대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속이 쓰렸다.

 

누구처럼 안하무인 도련님이라고까진 하지 않겠지만 천방지축 정도는 되는 김기정은 학창시절에서부터 이런저런 트러블을-그러니까 아주 큰 문제는 아니고, 석과의 사이에서 크고 작은 불화를-일으켰다.

서로 성격이 안 맞는 건 알았다. 석의 눈에 김기정의 만사는 ‘너무 대충’이었고 기정의 눈에 석은 ‘너무 빡빡한’ 사람이었다. 아마 유년기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것이고, 서로에게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이는 일도 없었겠지. 그걸 극복하고 여전히 친구이기에 더 지긋지긋하고, 동시에 아주 오래 보리라고 생각되는 녀석. 그게 기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가 달라져도 기정을 티비에서는 보겠거니, 석은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기정은 뜬금없이 입시 미술을 시작하더니 농구 코트를 떠나버렸다. 그 과정에서 있던 갈등은, 솔직히 석이 생각하기에도 좀 쪽팔린 감이 있으니 넘어가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김기정이 또 잠수를 탔다는 점. 그게 문제였다.

딴에는 그냥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고는 하는데, 석이 보기에 그건 잠수였다. (물론 석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기정은 해야 할 일은 모두 해치우고 길을 떠났다.) 애인의 연락도 친구의 연락도 받지 않고 훌쩍 떠나 없어지는 것. 그게 잠수가 아니면 뭔데?

더구나 기정은 항상 아무 친구 한 명을 골라서 그에게만 행선지를 알렸다. 덕분에 십중팔구의 연락이 석에게 몰렸고. 더 돌아버릴 거 같은 건, 석은 기정이 누구에게 연락을 남기고 갔을지를 대충 다 알았다는 거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게 석의 단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옛날부터도 그랬다. 기정은 원래부터 좀 이상하고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학교 곳곳에는 기정의 아지트가 있었다. 아지트라고 해봤자 대단한 공간은 아니었다. 학교의 잘 관리되지 않는 구석. 사람들이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곳들. 그렇게 방치되고 버려진 곳들이 기정의 쉼터였다.

그렇게 찾아낸 장소를 기정은 어느 날은 석에게 알려줬고, 어떤 날은 예온이나 호진에게 알려줬다. 무슨 기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기정이 사라지면 누구 한 명쯤은 그런 장소를 방문해 보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석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학교와 급식실 사이의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서 보았던 기정의 그 묘한 얼굴. 거기까지 떠올린 석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됐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알람이 씹힌 일이라든가, 배터리가 2% 남아있었던 일이라든가, 아까 받은 쨍쨍한 목소리의 김기정 전 여친 전화라든가. 석은 그거 말고도 열받을 일이 손에 다 꼽지도 못할 만큼 많았다.

김기정 개자식.

개새끼.

10시인데도 햇빛은 쨍쨍했다. 편의점 차양을 벗어나자마자 날카롭게 뺨이며 눈을 찌르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반쯤 충전된 보조배터리를 사 나온 석은 죽어버린 1교시 출결과 지금 뛰어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3교시 강의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짜증은 사람을 충동질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소라면 정말이지 하지 않을 법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째 버릴까? 오늘을 기념비적인 황보석 자체휴강의 날로 삼을까? 하는.

학점 관리와 현실의 이런저런 장벽이 석의 이성을 두드렸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황보석의 감성은 단 하나의 목표를 호소했다.

김기정 찾아가서 멱살 잡기.

그래서 석은 딱 세 가지 행동을 했다.

첫째, 호진이에게 전화하기.

둘째, 창원중앙역으로 가는 기차표 끊기.

셋째, 무작정 광암해수욕장 돌아다니며 김기정 찾기.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석이 겪은 고난과 역경을 묘사하려면 대략 12500자 정도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걸 생략하고 결과만 말씀드리겠다. 석은 기정을 만났다. 그것도 바가지가 잔뜩 씐 콘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고 있는 기정을.

기정의 뒷모습을 보고 석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허나 이내 그랬던 일이 없던 양 거칠게 기정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한산한 5월 말의 해수욕장이어서 그랬을까, 기정은 놀란 듯 순간 중심을 잃었다.

황망하게 뜨인 눈동자가 주위를 훑으며 석의 얼굴을 발견하고, 동그랗게 커지기까지가 한순간, 그리고 또 석이 기정의 후드 모자를 잡아 기정을 붙들기까지가 두 순간. 기정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지켜냈다. 기정은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침묵했다. 석은 고개를 비뚜름이 하고 기정을 쳐다보았다. 황당함과 짜증이 잠시 대치했다. 패배한 건 어이를 잃은 쪽이었다.

“뭐야? 너 어떻게 왔어?”

“네가 생각하는 게 뻔하지. 웬일로 국내여행이냐?”

석은 입술을 비죽 대며 벤치에 기대앉았다. 오래된 나무와 나사가 끼익 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옆에 놓인 가방을 보니 기정은 이곳에 앉아 그림이라도 그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기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석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뭐.

“그냥, 이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 들르고 싶었거든.”

할 말이 없어져 석은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부터 김기정이 미술 얘기만 하면 황보석은 할 말이 없었다. 기정의 어머니는 예술가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기정에게 예술적 소양이란 숨을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란 석에게는 그렇지 못했고. 운이 좋으면 나 피카소 알아! 모나리자! 따위의 대답이 나왔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다 같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꼴이 됐다. 기정은 어느 순간부터 농구, 간식거리, 게임 이야기만 했다.

아마 그건 불행은 아니었을 거다. 기정도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너야말로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네 뒤통수 갈기러.”

“소원 이뤘네.”

아직이지, 그렇게 말하며 석은 커다란 손바닥을 들었으나 기정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하니 어쩐지 의욕이 달아나서, 석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아이스크림은 왜 두 개 샀냐.”

“맛이 다르잖아, 이건 바닐라, 이건 쌀.”

“쌀?”

기정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더러워져서, 석은 제 찝찝함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나를 고민했다. 고개를 꺾으며 벤치에 깊숙이 기대자 벤치는 곧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하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니 기정은 석을 비웃었다.

“너 고등학생 때 생각나냐?”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던 기정이 잠시 얼굴을 들었다. 석은 기정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가끔씩 학교 구석 이상한 데 틀어박히고 그랬잖아.”

기정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랬나.”

“그랬어.”

“그래서?”

입을 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이딴 대화를 시작했지? 석은 후회했다. 무어라 대화를 이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석은 왜 기정이 혼자 그런 곳에 있었는지, 또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모르고만 싶었다. 석이 망설이는 사이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끝낸 기정은 손을 대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석에게 내밀었다.

“할 거 없지? 그거 먹고 미술관 가자.”

“뭐?”

“그거 쌀 맛이야.”

석이 질색하는 표정을 하든 말든, 기정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석은 기정을 따랐다.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게 통념이었고 미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도슨트도 없이 미술관 안을 헤매야 한다면 통념은 사실이 되곤 했다. 석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쪽이었고, 이 경우에는 굳이 ‘현대’ 미술이 아니어도 어려워졌다.

선이니 붓 터치니 텍스쳐나 광원. 석은 그런 말들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림을 보며 석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은 두 가지였다. 반짝거린다, 아니다. 닮게 그렸다,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 이따위 것을 감상이랍시고 내놓을 수는 없었으니 석은 기정의 감상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거나 했다.

그나마가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양식을 좋다고 느끼니까. 석에게 익숙한 것은, 김기정의 그림이었고.

기정은 자기의 스타일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괜찮네.”

“너한테 안목이라는 게 존재했다니 놀랍구나.”

“왜 시비야?”

기정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는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빛이 어쩌고 구도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 텍스쳐가 다른 재료 여러 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대상의 물성을 극대화했어. 작가가 어떤 심상을 그리려고 했는지 느껴져?

아니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게 답할 수 없어 석은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다. 기정이 왜 저렇게 신이 났는지, 기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뭐가 기정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석으로서는 정말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기정은 홀로 조용한 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그냥 하나만 기억해.”

“뭐를.”

“좋다는 거. 네가 느낀 좋다는 감상만큼은 가짜가 아니니까.”

그게 예술을 이해하는 기본이거든. 기정이 덧붙인 말에 석은 심드렁하게 그러냐 답했다. 그러고서도 두 사람은 조용히 한참을 걸었다. 기정이 작품을 감상하느라 발을 멈추면 석은 그 뒤에서 작품을 보는 기정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뒤통수를.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석은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기정에게 따지고 싶었다. 잠수 좀 그만 타고, 네 지인들 연락 좀 나한테 그만 오게 하라고. 그런데 어쩌면 그건 전부 석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모른다 답하고 전화를 끊으면 그만이었을 거다. 몇 번 화라도 냈으면 더 완벽했겠지.

“너 자꾸 잠수 타는 거 말이다.”

기정은 다 무너진 집 모양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캔버스에 천과 아크릴.

“잠수라니. 할 일도 다 끝내고 오는데.”

눅눅한 초록색으로 덮인 데님 위에 다시 리넨으로 된 흰 창문,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피처럼 튀긴 잿빛의 아크릴.

“난 내가 그것 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했거든. 다들 자꾸 나한테 연락하니까. 귀찮아서.”

“…….”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고도 기정은 석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면…… 난 대체 뭐에 화가 난 거냐?”

돌아보지 않아도 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기정이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은 아주 오랫동안 석과 친구들이었다. 슛을 넣을 때 손을 뻗는 타이밍이라든가, 웃을 때 보조개가 얼마나 패이는가 같은 것들.

“아까 아지트 얘기했잖아?”

기정은 우울한 집의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파인즈 그레이와 무채색의 중간 색조로 칠해진 이 하늘빛을 만들기 위해 아크릴을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기정은 잘 알았다.

“거기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 보인다. 몰랐지? 나 거기서 그림 그렸어. 그림 그리고 싶어서 거기 갔던 거야.”

“…….”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나는 내가 너네를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는 너네가 한 번도 안 짓던 표정을 짓는 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기정은 이 그림의 작가를 만나본 적 있었다. 우울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르게 유쾌한 사람이었다.

“다른 애들은 그러려니 싶었는데 니가 그러는 거 보니까 뭔가 존나 서운하더라?”

침묵이 간지러웠다. 기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몰랐는데 니가 나한테 존나 특별한 친구였던 거지. 야, 근데, 뭐냐. 그래 봤자 여전히 나는 너를 제일 잘 알고, 니도 그렇고,”

하지만 끝이 횡설수설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아 기정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제 오그라드는 진심이 전해졌으려나 싶어 기정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

석은 슬쩍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뭔 소리야?”

“……와, 아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답이 이거라고?”

“아니 진짜 뭔 소리냐고.”

“아, 됐어. 나 더 말 안 해. 넌 걍 저기 휴게실 가서 카페에나 앉아 있어라.”

기정이 석의 등짝을 내리치며 석을 쫓아냈다. 석은 기정에게 밀려나면서도 대체 뭔 소리를 한 거냐며 재차 물어댔다. 기정은 절대로 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고. 석을 휴게 공간에 버려두고 돌아와서야 기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돌대가리에게는 다시는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리고 석은, 그제야 얼굴에 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한다고?

내가 지를 제일 잘 알고, 지가 나를 제일 잘 알면 어쩔 건데?

이상하게 자꾸 낯이 홧홧해져서 석은 얼음만 계속 씹었다. 기정이 한 말이 오글거려서. 그렇게 생각했다.

줄곧 무시해왔던 무언가가 시작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의 기분을. 가슴께가 울렁거리고, 턱을 앙다물게 되던 순간을. 왜 그렇게까지 불쾌했던 걸까?

낯설음이라는 말도, 또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도, 어린애에게는 낯간지럽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서로에 대한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속이 쓰렸다.

 

누구처럼 안하무인 도련님이라고까진 하지 않겠지만 천방지축 정도는 되는 김기정은 학창시절에서부터 이런저런 트러블을-그러니까 아주 큰 문제는 아니고, 석과의 사이에서 크고 작은 불화를-일으켰다.

서로 성격이 안 맞는 건 알았다. 석의 눈에 김기정의 만사는 ‘너무 대충’이었고 기정의 눈에 석은 ‘너무 빡빡한’ 사람이었다. 아마 유년기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적당히 거리를 두었을 것이고, 서로에게 낯간지러운 이름을 붙이는 일도 없었겠지. 그걸 극복하고 여전히 친구이기에 더 지긋지긋하고, 동시에 아주 오래 보리라고 생각되는 녀석. 그게 기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가 달라져도 기정을 티비에서는 보겠거니, 석은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기정은 뜬금없이 입시 미술을 시작하더니 농구 코트를 떠나버렸다. 그 과정에서 있던 갈등은, 솔직히 석이 생각하기에도 좀 쪽팔린 감이 있으니 넘어가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김기정이 또 잠수를 탔다는 점. 그게 문제였다.

딴에는 그냥 영감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고는 하는데, 석이 보기에 그건 잠수였다. (물론 석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기정은 해야 할 일은 모두 해치우고 길을 떠났다.) 애인의 연락도 친구의 연락도 받지 않고 훌쩍 떠나 없어지는 것. 그게 잠수가 아니면 뭔데?

더구나 기정은 항상 아무 친구 한 명을 골라서 그에게만 행선지를 알렸다. 덕분에 십중팔구의 연락이 석에게 몰렸고. 더 돌아버릴 거 같은 건, 석은 기정이 누구에게 연락을 남기고 갔을지를 대충 다 알았다는 거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게 석의 단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옛날부터도 그랬다. 기정은 원래부터 좀 이상하고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학교 곳곳에는 기정의 아지트가 있었다. 아지트라고 해봤자 대단한 공간은 아니었다. 학교의 잘 관리되지 않는 구석. 사람들이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곳들. 그렇게 방치되고 버려진 곳들이 기정의 쉼터였다.

그렇게 찾아낸 장소를 기정은 어느 날은 석에게 알려줬고, 어떤 날은 예온이나 호진에게 알려줬다. 무슨 기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기정이 사라지면 누구 한 명쯤은 그런 장소를 방문해 보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석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학교와 급식실 사이의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서 보았던 기정의 그 묘한 얼굴. 거기까지 떠올린 석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됐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알람이 씹힌 일이라든가, 배터리가 2% 남아있었던 일이라든가, 아까 받은 쨍쨍한 목소리의 김기정 전 여친 전화라든가. 석은 그거 말고도 열받을 일이 손에 다 꼽지도 못할 만큼 많았다.

김기정 개자식.

개새끼.

10시인데도 햇빛은 쨍쨍했다. 편의점 차양을 벗어나자마자 날카롭게 뺨이며 눈을 찌르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반쯤 충전된 보조배터리를 사 나온 석은 죽어버린 1교시 출결과 지금 뛰어가야 시간을 맞출 수 있는 3교시 강의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에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짜증은 사람을 충동질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소라면 정말이지 하지 않을 법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다 째 버릴까? 오늘을 기념비적인 황보석 자체휴강의 날로 삼을까? 하는.

학점 관리와 현실의 이런저런 장벽이 석의 이성을 두드렸지만, 솔직히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황보석의 감성은 단 하나의 목표를 호소했다.

김기정 찾아가서 멱살 잡기.

그래서 석은 딱 세 가지 행동을 했다.

첫째, 호진이에게 전화하기.

둘째, 창원중앙역으로 가는 기차표 끊기.

셋째, 무작정 광암해수욕장 돌아다니며 김기정 찾기.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석이 겪은 고난과 역경을 묘사하려면 대략 12500자 정도가 필요하겠지만 모든 걸 생략하고 결과만 말씀드리겠다. 석은 기정을 만났다. 그것도 바가지가 잔뜩 씐 콘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고 있는 기정을.

기정의 뒷모습을 보고 석은 살짝 움츠러들었다. 허나 이내 그랬던 일이 없던 양 거칠게 기정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한산한 5월 말의 해수욕장이어서 그랬을까, 기정은 놀란 듯 순간 중심을 잃었다.

황망하게 뜨인 눈동자가 주위를 훑으며 석의 얼굴을 발견하고, 동그랗게 커지기까지가 한순간, 그리고 또 석이 기정의 후드 모자를 잡아 기정을 붙들기까지가 두 순간. 기정은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아이스크림을 지켜냈다. 기정은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든 채 침묵했다. 석은 고개를 비뚜름이 하고 기정을 쳐다보았다. 황당함과 짜증이 잠시 대치했다. 패배한 건 어이를 잃은 쪽이었다.

“뭐야? 너 어떻게 왔어?”

“네가 생각하는 게 뻔하지. 웬일로 국내여행이냐?”

석은 입술을 비죽 대며 벤치에 기대앉았다. 오래된 나무와 나사가 끼익 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옆에 놓인 가방을 보니 기정은 이곳에 앉아 그림이라도 그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기정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석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뭐.

“그냥, 이 근처에 있는 미술관에 들르고 싶었거든.”

할 말이 없어져 석은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부터 김기정이 미술 얘기만 하면 황보석은 할 말이 없었다. 기정의 어머니는 예술가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기정에게 예술적 소양이란 숨을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평범한 집에서 평범하게 자란 석에게는 그렇지 못했고. 운이 좋으면 나 피카소 알아! 모나리자! 따위의 대답이 나왔고, 그렇지 못한 날에는 다 같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꼴이 됐다. 기정은 어느 순간부터 농구, 간식거리, 게임 이야기만 했다.

아마 그건 불행은 아니었을 거다. 기정도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너야말로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네 뒤통수 갈기러.”

“소원 이뤘네.”

아직이지, 그렇게 말하며 석은 커다란 손바닥을 들었으나 기정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을 보자 하니 어쩐지 의욕이 달아나서, 석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아이스크림은 왜 두 개 샀냐.”

“맛이 다르잖아, 이건 바닐라, 이건 쌀.”

“쌀?”

기정은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왠지 기분이 더러워져서, 석은 제 찝찝함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나를 고민했다. 고개를 꺾으며 벤치에 깊숙이 기대자 벤치는 곧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새된 소리를 질러댔다. 하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니 기정은 석을 비웃었다.

“너 고등학생 때 생각나냐?”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던 기정이 잠시 얼굴을 들었다. 석은 기정을 쳐다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가끔씩 학교 구석 이상한 데 틀어박히고 그랬잖아.”

기정은 아이스크림을 크게 베어 물었다.

“그랬나.”

“그랬어.”

“그래서?”

입을 열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이딴 대화를 시작했지? 석은 후회했다. 무어라 대화를 이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석은 왜 기정이 혼자 그런 곳에 있었는지, 또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모르고만 싶었다. 석이 망설이는 사이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끝낸 기정은 손을 대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석에게 내밀었다.

“할 거 없지? 그거 먹고 미술관 가자.”

“뭐?”

“그거 쌀 맛이야.”

석이 질색하는 표정을 하든 말든, 기정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는 수 없이 석은 기정을 따랐다.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게 통념이었고 미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도슨트도 없이 미술관 안을 헤매야 한다면 통념은 사실이 되곤 했다. 석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쪽이었고, 이 경우에는 굳이 ‘현대’ 미술이 아니어도 어려워졌다.

선이니 붓 터치니 텍스쳐나 광원. 석은 그런 말들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그림을 보며 석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은 두 가지였다. 반짝거린다, 아니다. 닮게 그렸다, 뭘 그렸는지 모르겠다. 이따위 것을 감상이랍시고 내놓을 수는 없었으니 석은 기정의 감상에 대강 고개를 끄덕이거나 했다.

그나마가 있다면.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양식을 좋다고 느끼니까. 석에게 익숙한 것은, 김기정의 그림이었고.

기정은 자기의 스타일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거 괜찮네.”

“너한테 안목이라는 게 존재했다니 놀랍구나.”

“왜 시비야?”

기정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는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빛이 어쩌고 구도가 어쩌고 하는 이야기. 텍스쳐가 다른 재료 여러 가지를 조화롭게 사용해서 대상의 물성을 극대화했어. 작가가 어떤 심상을 그리려고 했는지 느껴져?

아니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게 답할 수 없어 석은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다. 기정이 왜 저렇게 신이 났는지, 기정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뭐가 기정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 석으로서는 정말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기정은 홀로 조용한 석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그냥 하나만 기억해.”

“뭐를.”

“좋다는 거. 네가 느낀 좋다는 감상만큼은 가짜가 아니니까.”

그게 예술을 이해하는 기본이거든. 기정이 덧붙인 말에 석은 심드렁하게 그러냐 답했다. 그러고서도 두 사람은 조용히 한참을 걸었다. 기정이 작품을 감상하느라 발을 멈추면 석은 그 뒤에서 작품을 보는 기정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뒤통수를.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석은 제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기정에게 따지고 싶었다. 잠수 좀 그만 타고, 네 지인들 연락 좀 나한테 그만 오게 하라고. 그런데 어쩌면 그건 전부 석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모른다 답하고 전화를 끊으면 그만이었을 거다. 몇 번 화라도 냈으면 더 완벽했겠지.

“너 자꾸 잠수 타는 거 말이다.”

기정은 다 무너진 집 모양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캔버스에 천과 아크릴.

“잠수라니. 할 일도 다 끝내고 오는데.”

눅눅한 초록색으로 덮인 데님 위에 다시 리넨으로 된 흰 창문, 그리고 그 위에 다시 피처럼 튀긴 잿빛의 아크릴.

“난 내가 그것 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했거든. 다들 자꾸 나한테 연락하니까. 귀찮아서.”

“…….”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고도 기정은 석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면…… 난 대체 뭐에 화가 난 거냐?”

돌아보지 않아도 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기정이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은 아주 오랫동안 석과 친구들이었다. 슛을 넣을 때 손을 뻗는 타이밍이라든가, 웃을 때 보조개가 얼마나 패이는가 같은 것들.

“아까 아지트 얘기했잖아?”

기정은 우울한 집의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파인즈 그레이와 무채색의 중간 색조로 칠해진 이 하늘빛을 만들기 위해 아크릴을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기정은 잘 알았다.

“거기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잘 보인다. 몰랐지? 나 거기서 그림 그렸어. 그림 그리고 싶어서 거기 갔던 거야.”

“…….”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나는 내가 너네를 제일 잘 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거기서는 너네가 한 번도 안 짓던 표정을 짓는 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기정은 이 그림의 작가를 만나본 적 있었다. 우울한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르게 유쾌한 사람이었다.

“다른 애들은 그러려니 싶었는데 니가 그러는 거 보니까 뭔가 존나 서운하더라?”

침묵이 간지러웠다. 기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몰랐는데 니가 나한테 존나 특별한 친구였던 거지. 야, 근데, 뭐냐. 그래 봤자 여전히 나는 너를 제일 잘 알고, 니도 그렇고,”

하지만 끝이 횡설수설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아 기정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제 오그라드는 진심이 전해졌으려나 싶어 기정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

석은 슬쩍 미간을 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뭔 소리야?”

“……와, 아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답이 이거라고?”

“아니 진짜 뭔 소리냐고.”

“아, 됐어. 나 더 말 안 해. 넌 걍 저기 휴게실 가서 카페에나 앉아 있어라.”

기정이 석의 등짝을 내리치며 석을 쫓아냈다. 석은 기정에게 밀려나면서도 대체 뭔 소리를 한 거냐며 재차 물어댔다. 기정은 절대로 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고. 석을 휴게 공간에 버려두고 돌아와서야 기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돌대가리에게는 다시는 이런 이야기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그리고 석은, 그제야 얼굴에 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걸 자기 입으로 말한다고?

내가 지를 제일 잘 알고, 지가 나를 제일 잘 알면 어쩔 건데?

이상하게 자꾸 낯이 홧홧해져서 석은 얼음만 계속 씹었다. 기정이 한 말이 오글거려서. 그렇게 생각했다.

줄곧 무시해왔던 무언가가 시작되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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