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rning; 사망소재
Warning; 사망소재
Name:
햄베
Role:
Novel
어느 날 김기정이 말했다. 만약에 세상이 망해. 뜬금없는 질문에 황보석은 느닷없이 그런 생각은 왜 하는 거냐며, 구겨진 얼굴로 김기정을 타박했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황보석의 어깨에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날린 김기정이 말을 이었다. 아니 좀 들어봐.
“만약에 세상이 망해. 근데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전부 없던 일로 만들고 세상을 구할 수 있대. 그럼 넌 그 사람 죽일 거야?”
“흠…. 죽, 이지 않을까? 좀 찝찝하긴 해도 나랑 아는 사이 아니면 괜찮을지도…. 아 좀 그런가.”
“황보석 존나 매정하네. 그럼 만약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면? 좀 친해. 그래도 죽일 거야?”
“아니 뭐 어쩌라는 거야. 몰라. 죽이든가, 새끼야.”
황보석의 짜증 섞인 대답 사이로 김기정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섞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김기정은 황보석에게 있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나 말 대부분은 알 수 없는 흐름에서부터 비롯되었고, 그런 그의 행동을 반이나 이해하면 많이 이해한 편이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질문부터, 코트 위에서 날아드는 패스까지. 그래서 황보석은 그를 이해하려고 꼬치꼬치 캐는 것보다 그냥 그의 흐름에 휘둘리기를 택했다. 가끔 휘둘리는 정도가 심해서 멀미가 날 것 같은 날엔 종종, 아니 자주 짜증을 내곤 했지만.
∞
어느날 김기정이 죽었다. 사인은 아무도 모른댔다. 그건 사고였을까? 황보석에게 있어서 김기정의 죽음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 커다란 일이 된 나머지 본인의 일인 줄도 모르는 것처럼 대했다. 가끔 황보석은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폴폴 풍겨대던 놈의 최후가 이런 거라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고. 그래서 황보석은 김기정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슬퍼하지 못했다? 아무튼. 씩씩하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친구라는 놈을 잘 보내주었다. 코트를 훌렁 떠나버렸다가 미련 뚝뚝 흐르는 발걸음과 함께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언젠가 눈앞에 다시 나타나겠거니. 그게 황보석이 눈을 감기 직전이 되더라도 말이다.
김기정의 부재가 있음에도 황보석의 날은 여상했다. 아침이 되면 해가 떴고, 밤이 되면 달이 떴다. 어느 날은 맑았고, 어느 날은 흐렸다. 아주 더운 날이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찾아왔고, 시원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햇볕이 쨍쨍한 날이 반복됐다.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입시를 위한 공부를 했고, 체육관에서 뛰는 날보다 책상에 앉아 펜 잡는 날이 늘었다. 가끔은 고상언과 도재혁을 비롯한 남은 후배들의 연습을 위해 주장 완장 차고 아침 일찍 체육관에 눈도장도 찍었다. 아무도 김기정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아무도 김기정을 잊지 않았고, 모두가 김기정을 기억했지만, 누구도 김기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건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들만의 어떠한, 암묵적인 룰과 같은 거였다.
황보석은 가끔 꿈을 꾸었다. 김기정과 농구가 아닌 것들을 같이하는 꿈. 꿈에서 김기정은 여전했고, 황보석은 아니었다. 꿈속의 황보석은 김기정을 모르는 놈처럼 대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19년 살면서 볼 거 다 본 사이에 이제 와서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취미가 뭐야 이딴 거 물어보기엔 좀 황당하잖은가. 황보석은 그런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꼭 찬물로 세수를 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
그것이 정말로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부재로부터 한 달 반쯤 됐나. 이제 막 찾아온 낙엽과 함께 김기정이 나타났다. 안녕, 나는 김기정이야. 전학생이라서 잘 모르니까 많이 알려줘. 친하게 지내자. 황보석은 그 장면을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죽은 사람이 하면 안 되는 행동 1위, 부활. 황보석은 제가 꿈을 꾸는데 못 깨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옆 분단의 반호진과 김예온이 쑥덕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와, 고3 끝물에 전학을 오네. 장난하냐? 전학이 문제가 아니잖아. 황보석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눈이 피로해서 헛것을 보나. 아니면 죽었다 깬 놈이 저 새끼가 아니라 나인가. 기정이는 저 뒤에 석이 옆에 앉자. 담임의 말에 김기정은 황보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두고, 품에 가득 안은 쓸모도 없는 교과서를 책상 서랍에 넣어둔 김기정은 황보석을 돌아보았다.
“잘 부탁한다, 석아.”
똑같았다. 목소리부터 말투, 습관, 그리고 웃는 얼굴까지. 황보석은 그에게 차마 침을 뱉고 쌍욕을 할 수가 없어서, 표정을 한껏 구긴 채로 이를 빠득 갈았다.
∞
김기정이 나타난 후로 황보석의 일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죽었던 놈이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황보석을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김기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어디서 왔어, 뭐 때문에 전학 왔어, 어디 살아, 등등. 진짜 나만 이상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황보석이 인상을 쓴 채로 김기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면, 김기정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그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면 황보석은 작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가끔, 진짜 아주 가끔. 김기정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더군다나 황보석에게 있어서 김기정의 죽음이란 너무나 큰 나머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일과 같아서,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대했고, 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일,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되어버릴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야, 너네 진짜 왜 그래? 김기정이잖아, 김기정.”
“응, 기정이가 왜?”
“아니, 하…. 왜, 냐고 물은 거냐, 지금? 나야말로 묻고 싶다. 10년 넘게 본 새끼잖아. 왜 모르는 척해?”
“야, 우리야말로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좀 무리하는 거 같던데, 힘들면 보건실 가서 쉬어. 내가 쌤한테 말할게.”
하, 하하…. 참다 참다 못 한 황보석이 김예온과 반호진을 불러다가 진지하게 말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되려 황보석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작 두어 달 전까지 한평생을 같이 농구해 온 소꿉친구를 어떻게 그렇게 쏠랑 잊어버릴 수가 있냐고. 황보석은 말도 안 통하는 친구들의 이상한 태도를 바로잡다 지쳐 포기했다. 그리고 그냥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이 나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을 왕따 시키는 거다, 됐냐? 내가 맞고 니네가 틀렸다고.
∞
어느 날 후배들이 농구부 일로 물어볼 게 있다며 반으로 찾아왔던 일이 있었다. 은퇴했어도 주장은 주장이라고, 따박따박 저에게 찾아오는 꼴이 귀찮았어도 퍽 귀엽다고 느꼈을 무렵. 190 넘는 운동부 셋이 뒷문을 꽉 막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핀잔이 날아온다. 키 작은놈은 나가지도 말란 거야, 뭐야~. 등 뒤에 선 난감한 표정의 김기정을 마주하자, 황보석은 그대로 굳는다. 제 앞의 후배 놈들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자, 김기정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황보석과 문틀 사이를 쏙 빠져나갔다. 멍한 표정의 황보석에게 괜찮냐고 묻는 후배의 목소리에, 황보석은 파득 정신을 차렸다. 김기정이 사라진 복도 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보석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재혁아, 너 기억하냐? 협회장기랑 쌍용기 때 걸쳐서, 농구부 나갔다 말았다 하면서 물 흐렸던 놈.”
“네? 아…. 네, 기억은… 하죠? 근데 누군지까지는 잘 기억 안 나요. 그때 워낙 분위기 어수선했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는 거야, 잊은 거야? 고상언, 넌 기억해? 김기정이었잖아.”
“김기정이요? 농구부 선배 중에요? 잘 모르겠는데.”
∞
황보석에게만큼은 김기정이 남겨놓은 대부분의 것들이 남아있었다. 어릴 적에 찍었던 사진,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생일 축하 엽서, 재미랍시고 헛돈 주고 생고생해서 뽑았던 인형, 그리고 언젠가 김기정이 코트를 떠나면서 내던진 운동화 두 짝. 이게 황보석에게 남은 김기정의 전부였다. 전부여야만 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살아있는 놈이, 죽은 놈을 빼내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황보석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김기정과의 메세지창을 열었다. 그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는 고작 ‘ㅇㅇ’ 단 두 글자. 그의 부재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는지 알겠는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충동적인 선택은 절망을 명확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당연히 누가 받을 거라고 생각조차 안 했다마는, 수화기 너머로 돌아오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머리를 싸늘하게 했다. 김기정이 10년 가까이 유지하던 번호는 하루아침에 없는 번호가 됐다. 김기정이 죽은 이후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앨범에서도 김기정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보석에게 남겨진 것 빼고는 어떠한 곳에서도 김기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도 김기정이 죽었다는 걸 모르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리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고 한들, 이딴 식으로 잊히는 건 그 자식한테도, 나한테도 실례인 거잖아. 황보석은 김기정을 떠나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울었다.
∞
“김기정, 잠깐 얘기 좀 해.”
어느날 황보석은 김기정을 따로 불러냈다. 김기정이라면 저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미쳐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기 때문인지. 어떻게 잘못됐다, 까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김기정은 황보석의 말에 순순히 따라 나왔다. 황보석이 그의 손에 웬 등신 같은 초코 음료를 사다 들려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보석은 체육관으로 김기정을 이끌었다. 가장 그에게 익숙한 곳이자, 마음대로 사용해도 크게 혼나지 않았고, 가장 감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한 곳. 운이 좋았는지,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신발 밑창과 체육관 바닥이 마찰하며 비명을 질렀다. 퉁, 퉁. 공이 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황보석은 농구공을 쥔 김기정과 마주쳤다. 어느새 보관함을 열어 농구공을 가져와서는 드리블하는 모습에 황보석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 지금 뭐 해? 황보석의 외침에 림을 향해 날아가던 농구공은 백보드를 맞고 튕겨 나와 바닥에 굴렀다. 바닥을 튀다가 구석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 주워 드는 김기정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김기정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사랑이라는 건 뭘까?”
“뭔, 씹…. 뭐?”
“대체 뭐길래, 세계가 멸망해도 좋다고 하는 걸까.”
“갑자기 뭔 소리야?”
느닷없는 김기정의 질문에 황보석은 선빵으로 날리려던 질문을 모조리 까먹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김기정은 바닥에 공을 다시 튕겼다가 잡기를 반복했다. 황당함을 금치 못한 황보석이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무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김기정이 그의 흐름을 끊는다. 황보석.
“만약에,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떡할래?”
“…야, 김기정.”
“나는 네가 했던 선택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너니까.”
황보석은 며칠간 김기정과 말도 섞지 않았다. 그때 김기정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안 떠나가…서는 아니고. 그냥 좀 비위가 상해서 그랬다. 무맥락 뜬금포로 허튼소리 던지는 것도, 체육관 들어서자마자 농구공부터 튕기는 것도, 너무 그 녀석과 똑같아서. 김기정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부글부글, 두개골이 찌이잉, 맥박이 울렁울렁.
∞
어느 날 황보석은 생활기록부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썩을, 이딴 허접한 독후감으로 생기부 채우는 게 무슨 도움씩이나 된다고. 그래도 담임의 권유에다 대고 귀찮으니 싫다고 뻗댈 수도 없었으니, 황보석은 얌전히 쉬는 시간 혹은 점심시간에 얌전히 도서관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렵기만 한 고전 문학, 관심도 없는 이들의 자서전이나 에세이, 아니면 경영, 아니면 코딩, 아니면 사학. 빼곡한 책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봤자 구미가 당기는 책은 없고, 펼쳤다간 구역질만 나올 것 같은 책뿐이다. 남들은 뭘 읽었나 좀 볼까 싶어 다가간 북 트럭에 쌓인 책도 열 권이 채 되질 않는다. 얘들아 책 좀 읽어라, 책 좀. 책더미라고 하기도 우스운 책들의 제목을 찬찬히 훑던 중, 황보석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유일하게 사랑하지 않은 세계>
[세계의 존망이 사랑에 달려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세계의 종말이 카운트되는 트리거가 당겨진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4백 번 하고도 열세 번의 차원을 건너서, 종말을 마주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낸 이의 결말은?]
책 뒤표지에 적힌 개요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누군가는 그저 흥미로운 SF소설이라며 흘끔 보고 넘어갔겠지만, 황보석은 어쩐지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종말을 향한 트리거가 당겨질 때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사랑을 저버리면서까지 몸부림치는 차원 여행자의 이야기. 휑한 북트럭 앞에 서서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홀린 듯이 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종이 울리는 순간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리곤, 그제야 부랴부랴 대출 신청을 하고 교실로 뛰어갔다.
‘너랑 내가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망한다는 걸 알아. 그래도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랑 다시 사랑에 빠지면, 그럼 우린 또 헤어져야 하는 걸까. 이미 트리거는 당겨졌어. 그 말은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야.’
∞
김기정이 전학을 온 후부터 졸업식까지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린 탓에 뭘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황보석은 수능을 포함한 입시 준비에 허덕이느라 더 그랬다. 김기정의 여유로운 표정을 마주칠 때마다 황보석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모른 체 하기에 바빴다. 미술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그래서 전학 온 후로도 얼굴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었나 싶기도 했다. 그를 반쯤 모르는 사람 보듯 대하던 황보석에게는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진짜로. 반호진이나 김예온의 성공적인 입시에 잇따라 황보석도 원하던 학교 합격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농구부 후배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그들의 역할을 넘겨받았고 3학년의 정식적인 퇴부를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졸업식 날은 날씨가 영하까지 내려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패딩에 목도리까지 꽁꽁 싸맨 채로 체육관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게 퍽 우스웠다. 하나둘씩 이름이 불리면 단상으로 나가 졸업장을 받았고, 1년에 한 번 부를까 말까 하는 교가를 불렀고, 졸업을 축하한다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체육관에 모인 학생들은 한날한시에 졸업생 신분을 얻었다.
“황보석.”
득시글한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비집고 김기정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제가 신경을 안 쓰면 덩달아 모르는 체하던 놈인데 어쩐 일로 저를 부르나, 싶었던 황보석은 발걸음을 옮겨 김기정에게 다가갔다. 체육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인파를 거슬러 들어가자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바람에 황보석은 인상을 팍 구겼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마주한 김기정은 새하얀 꽃다발을 든 채 여전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물어본 적 있지? 한 사람의 목숨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얼마 전에?”
“아니, 한…. 초가을쯤?”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기정의 말에 따라 기억을 더듬던 황보석은 당황한 표정을 했다. 학생인지 학부모인지 모를 인간들은 역으로 파도를 거슬렀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선 게, 꼭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저릿한 게 추워서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는 이 기분. 김기정이 든 꽃다발이 파르르 떨린다. 흰 튤립과 안개꽃. 김기정은 잠시 꽃다발 위로 고개를 숙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입을 연다.
“지금은 어때. 그때랑 같아?”
“아니 뭔…. 제대로 설명을 해. 뭐하자는 거야, 이게.”
“하하하. 석아, 사랑이라는 건 너무 큰 책임을 지게끔 하는 것 같다.”
“뭐?”
하이씨, 이런 바보가 뭐가 좋다고 진짜. 김기정의 웃음소리에는 허탈함과 안도감, 그리고 이런저런 감정이 마구 뒤섞여있는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가 떨려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웃음을 짓는 김기정의 인영이 일렁이는 듯 보여서, 황보석은 다급하게 김기정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얼굴로 또 훌렁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네 선택이 변하지 않았길 빈다. 이건 선물.”
김기정이 품에 안은 것들을 몽땅 황보석에게 넘긴다. 꽃다발, 졸업앨범, 하물며 졸업장까지. 흰 튤립의 향이 냉큼 콧속으로 들이닥친다. 품 안으로 쏟아지는 물건에 황보석은 야이씨, 작게 읊조리며 허둥지둥 팔에 들린 물건을 정리했다. 김기정은 키득이는 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보석이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쑥 빼간다. 보답은 이걸로 받을게. 먼저 간다. 황보석의 어깨를 툭툭 친 김기정은 인파 속으로 스며든다. 크고 작은 머리통들이 김기정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이내 한참 멀어져서 2미터 조금 안 되는 키로도 찾을 수가 없다.
“야, 김기정!”
김기정을 따라잡으려다 발치에 걸리는 앨범 두 개에 휘청인 황보석은 자리에 멈춰서 한숨을 푹 내쉰다. 아니 뭐, 어쩌라고? 뭔데? 주섬주섬 짐 주워 들고, 이마에다 나 짜증 났다 써 붙인 모양으로 인상 한껏 구긴 채로 짐 한 아름 들고나온 황보석은 저를 기다렸던 친구들을 발견했다.
“뭐야, 김기정은?”
황보석이 짐 더미를 정리하는 동안 반호진과 김예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황보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김기정 너네랑 있는 거 아니었어? 이 새끼 아까 나한테 짐 던져놓고…. 흘러내린 가방 고쳐 매고, 무거운 졸업앨범 잘 고쳐 쥐고, 다른 한 손에 꽃다발 두 개 안으니 손이 꽉 찬다. 이상한 얼굴의 친구들을 한 번씩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우뚱, 눈썹을 으쓱. 뭔데, 라며 다시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상하다.
“…왜 그래, 석아. 갑자기 기정이 얘기가 왜 나와.”
“뭔 소리야?”
“김기정, 저번 가을에….”
죽었잖아.
∞
황보석은 무사히 대학교 신입생 타이틀을 달았다. 졸업식 날에 생겼던 알 수 없는 사건은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흐려졌다. 가끔 떠오르는 날엔 속이 울렁거려서 기분이 안 좋았지만, 꿈이라도 꿨나보다, 하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신입생 설명회 가서는 놓쳤다가 애먹는 것 없이 눈 부릅뜨고 설명 들었고, 수강 신청 날에는 친구들과 피시방에 모여 다리 달달 떨다가 성공했니 말았니 소리를 질렀다. 신입생 환영회 때는 선배들이 신입생을 그렇게 예뻐하시는 줄 몰랐는지, 주는 대로 다 받아먹다가 집에 네발로 기어들어 갔다. 이제 막 시작한 대학교 1학년 생활을 즐기기 시작할 때쯤이면 쏟아지는 과제와 함께 벚꽃이 만개하곤 한다.
“벚꽃 많이 폈네.”
“…김기정?”
분명 그가 아는 인영이었다. 삐죽빼죽 세운 머리에 축 늘어진 백팩, 옷 입는 꼬락서니 하며, 익숙한 디자인의 운동화까지. 황보석은 홀린 듯이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나지막이 소리 내 말한 이름에, 벚꽃 아래 선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황보석을 돌아보았다.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은 황보석이 질리도록 보고, 질리도록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신이시여. 놀라기는 황보석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석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김기정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추운 봄바람이 목덜미를 쉬익 스쳐 가서, 김기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이 뿌연 게 먼지 섞인 바람 탓인지, 아니면 정수리까지 뜨거워진 얼굴 탓인지, 아니면 코끝이 찡할 만큼 아프게 덮쳐오는 감정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황보석은 부들거리는 입꼬리 애써 끌어올리는 김기정의 얼굴을 빤히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하하하…. 석아….”
“제발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만약에, 누군가가 죽어야 세계를 구할 수 있어. 그럼 너는 어떻게 할래?”
“내가 여기서, 다른 답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
“……제발.”
김기정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고 벌게지는 눈에 눈물이 차서 눈동자가 일렁였다. 제발 그래 달라는 건지, 그러지 말아 달라는 건지. 괴로운 얼굴이다. 김기정은 종종, 아니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흐름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들은 황보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의중을 반이나 이해하면 많이 이해한 거였다. 그리고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굳이 이해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기정이 그런 줄 알라면 굳이 태클 걸면서도 그런 줄 알겠다고 하던 놈.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김기정이 저런 얼굴을 하는데, 멀뚱히 눈만 끔뻑이고 있는 게 맞나? 내가 내 입으로, 김기정에게 죽어달라고 말하는 게 맞느냐고. 어쩌면 이번에 트리거를 당긴 사람은 김기정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황보석은 생각했다. 땅이 꺼지라 한숨 깊게 내쉬고 황보석은 입을 연다.
“김기정.”
“…….”
“만약에 내가 죽어야만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러면 너는 꼭. 세계를 택해라.”
“석아….”
“그걸 위해서 몇 번이나 여기에 온 거잖아.”
세계를 구할래? 아니면…. 네가 겪었던 종말을 나에게도 줄래?
어느 날 김기정이 말했다. 만약에 세상이 망해. 뜬금없는 질문에 황보석은 느닷없이 그런 생각은 왜 하는 거냐며, 구겨진 얼굴로 김기정을 타박했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황보석의 어깨에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날린 김기정이 말을 이었다. 아니 좀 들어봐.
“만약에 세상이 망해. 근데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전부 없던 일로 만들고 세상을 구할 수 있대. 그럼 넌 그 사람 죽일 거야?”
“흠…. 죽, 이지 않을까? 좀 찝찝하긴 해도 나랑 아는 사이 아니면 괜찮을지도…. 아 좀 그런가.”
“황보석 존나 매정하네. 그럼 만약 그 사람이 아는 사람이면? 좀 친해. 그래도 죽일 거야?”
“아니 뭐 어쩌라는 거야. 몰라. 죽이든가, 새끼야.”
황보석의 짜증 섞인 대답 사이로 김기정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섞인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김기정은 황보석에게 있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나 말 대부분은 알 수 없는 흐름에서부터 비롯되었고, 그런 그의 행동을 반이나 이해하면 많이 이해한 편이었다. 이런 허무맹랑한 질문부터, 코트 위에서 날아드는 패스까지. 그래서 황보석은 그를 이해하려고 꼬치꼬치 캐는 것보다 그냥 그의 흐름에 휘둘리기를 택했다. 가끔 휘둘리는 정도가 심해서 멀미가 날 것 같은 날엔 종종, 아니 자주 짜증을 내곤 했지만.
∞
어느날 김기정이 죽었다. 사인은 아무도 모른댔다. 그건 사고였을까? 황보석에게 있어서 김기정의 죽음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 커다란 일이 된 나머지 본인의 일인 줄도 모르는 것처럼 대했다. 가끔 황보석은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폴폴 풍겨대던 놈의 최후가 이런 거라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고. 그래서 황보석은 김기정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 슬퍼하지 못했다? 아무튼. 씩씩하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친구라는 놈을 잘 보내주었다. 코트를 훌렁 떠나버렸다가 미련 뚝뚝 흐르는 발걸음과 함께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언젠가 눈앞에 다시 나타나겠거니. 그게 황보석이 눈을 감기 직전이 되더라도 말이다.
김기정의 부재가 있음에도 황보석의 날은 여상했다. 아침이 되면 해가 떴고, 밤이 되면 달이 떴다. 어느 날은 맑았고, 어느 날은 흐렸다. 아주 더운 날이 지나면 선선한 바람이 찾아왔고, 시원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햇볕이 쨍쨍한 날이 반복됐다. 졸업할 때가 다가오니 입시를 위한 공부를 했고, 체육관에서 뛰는 날보다 책상에 앉아 펜 잡는 날이 늘었다. 가끔은 고상언과 도재혁을 비롯한 남은 후배들의 연습을 위해 주장 완장 차고 아침 일찍 체육관에 눈도장도 찍었다. 아무도 김기정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아무도 김기정을 잊지 않았고, 모두가 김기정을 기억했지만, 누구도 김기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건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들만의 어떠한, 암묵적인 룰과 같은 거였다.
황보석은 가끔 꿈을 꾸었다. 김기정과 농구가 아닌 것들을 같이하는 꿈. 꿈에서 김기정은 여전했고, 황보석은 아니었다. 꿈속의 황보석은 김기정을 모르는 놈처럼 대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19년 살면서 볼 거 다 본 사이에 이제 와서 이름이 뭐야, 어디서 왔어, 취미가 뭐야 이딴 거 물어보기엔 좀 황당하잖은가. 황보석은 그런 꿈을 꾸다 잠에서 깨면 꼭 찬물로 세수를 했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
그것이 정말로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부재로부터 한 달 반쯤 됐나. 이제 막 찾아온 낙엽과 함께 김기정이 나타났다. 안녕, 나는 김기정이야. 전학생이라서 잘 모르니까 많이 알려줘. 친하게 지내자. 황보석은 그 장면을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죽은 사람이 하면 안 되는 행동 1위, 부활. 황보석은 제가 꿈을 꾸는데 못 깨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옆 분단의 반호진과 김예온이 쑥덕이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와, 고3 끝물에 전학을 오네. 장난하냐? 전학이 문제가 아니잖아. 황보석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꾹꾹 눌렀다. 눈이 피로해서 헛것을 보나. 아니면 죽었다 깬 놈이 저 새끼가 아니라 나인가. 기정이는 저 뒤에 석이 옆에 앉자. 담임의 말에 김기정은 황보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두고, 품에 가득 안은 쓸모도 없는 교과서를 책상 서랍에 넣어둔 김기정은 황보석을 돌아보았다.
“잘 부탁한다, 석아.”
똑같았다. 목소리부터 말투, 습관, 그리고 웃는 얼굴까지. 황보석은 그에게 차마 침을 뱉고 쌍욕을 할 수가 없어서, 표정을 한껏 구긴 채로 이를 빠득 갈았다.
∞
김기정이 나타난 후로 황보석의 일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죽었던 놈이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황보석을 제외한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김기정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어디서 왔어, 뭐 때문에 전학 왔어, 어디 살아, 등등. 진짜 나만 이상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황보석이 인상을 쓴 채로 김기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면, 김기정은 그 시선을 눈치채고 그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면 황보석은 작게 욕지거리를 뱉으며 시선을 피하곤 했다.
가끔, 진짜 아주 가끔. 김기정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더군다나 황보석에게 있어서 김기정의 죽음이란 너무나 큰 나머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일과 같아서,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대했고, 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일,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되어버릴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야, 너네 진짜 왜 그래? 김기정이잖아, 김기정.”
“응, 기정이가 왜?”
“아니, 하…. 왜, 냐고 물은 거냐, 지금? 나야말로 묻고 싶다. 10년 넘게 본 새끼잖아. 왜 모르는 척해?”
“야, 우리야말로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좀 무리하는 거 같던데, 힘들면 보건실 가서 쉬어. 내가 쌤한테 말할게.”
하, 하하…. 참다 참다 못 한 황보석이 김예온과 반호진을 불러다가 진지하게 말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되려 황보석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작 두어 달 전까지 한평생을 같이 농구해 온 소꿉친구를 어떻게 그렇게 쏠랑 잊어버릴 수가 있냐고. 황보석은 말도 안 통하는 친구들의 이상한 태도를 바로잡다 지쳐 포기했다. 그리고 그냥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이 나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고 내가 세상을 왕따 시키는 거다, 됐냐? 내가 맞고 니네가 틀렸다고.
∞
어느 날 후배들이 농구부 일로 물어볼 게 있다며 반으로 찾아왔던 일이 있었다. 은퇴했어도 주장은 주장이라고, 따박따박 저에게 찾아오는 꼴이 귀찮았어도 퍽 귀엽다고 느꼈을 무렵. 190 넘는 운동부 셋이 뒷문을 꽉 막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핀잔이 날아온다. 키 작은놈은 나가지도 말란 거야, 뭐야~. 등 뒤에 선 난감한 표정의 김기정을 마주하자, 황보석은 그대로 굳는다. 제 앞의 후배 놈들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자, 김기정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황보석과 문틀 사이를 쏙 빠져나갔다. 멍한 표정의 황보석에게 괜찮냐고 묻는 후배의 목소리에, 황보석은 파득 정신을 차렸다. 김기정이 사라진 복도 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보석이 조심스레 입을 연다.
“재혁아, 너 기억하냐? 협회장기랑 쌍용기 때 걸쳐서, 농구부 나갔다 말았다 하면서 물 흐렸던 놈.”
“네? 아…. 네, 기억은… 하죠? 근데 누군지까지는 잘 기억 안 나요. 그때 워낙 분위기 어수선했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모르는 거야, 잊은 거야? 고상언, 넌 기억해? 김기정이었잖아.”
“김기정이요? 농구부 선배 중에요? 잘 모르겠는데.”
∞
황보석에게만큼은 김기정이 남겨놓은 대부분의 것들이 남아있었다. 어릴 적에 찍었던 사진,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생일 축하 엽서, 재미랍시고 헛돈 주고 생고생해서 뽑았던 인형, 그리고 언젠가 김기정이 코트를 떠나면서 내던진 운동화 두 짝. 이게 황보석에게 남은 김기정의 전부였다. 전부여야만 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살아있는 놈이, 죽은 놈을 빼내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황보석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김기정과의 메세지창을 열었다. 그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는 고작 ‘ㅇㅇ’ 단 두 글자. 그의 부재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는지 알겠는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충동적인 선택은 절망을 명확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당연히 누가 받을 거라고 생각조차 안 했다마는, 수화기 너머로 돌아오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머리를 싸늘하게 했다. 김기정이 10년 가까이 유지하던 번호는 하루아침에 없는 번호가 됐다. 김기정이 죽은 이후로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앨범에서도 김기정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황보석에게 남겨진 것 빼고는 어떠한 곳에서도 김기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도 김기정이 죽었다는 걸 모르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리 없던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고 한들, 이딴 식으로 잊히는 건 그 자식한테도, 나한테도 실례인 거잖아. 황보석은 김기정을 떠나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울었다.
∞
“김기정, 잠깐 얘기 좀 해.”
어느날 황보석은 김기정을 따로 불러냈다. 김기정이라면 저의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미쳐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기 때문인지. 어떻게 잘못됐다, 까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김기정은 황보석의 말에 순순히 따라 나왔다. 황보석이 그의 손에 웬 등신 같은 초코 음료를 사다 들려줬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황보석은 체육관으로 김기정을 이끌었다. 가장 그에게 익숙한 곳이자, 마음대로 사용해도 크게 혼나지 않았고, 가장 감정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한 곳. 운이 좋았는지,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신발 밑창과 체육관 바닥이 마찰하며 비명을 질렀다. 퉁, 퉁. 공이 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황보석은 농구공을 쥔 김기정과 마주쳤다. 어느새 보관함을 열어 농구공을 가져와서는 드리블하는 모습에 황보석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 지금 뭐 해? 황보석의 외침에 림을 향해 날아가던 농구공은 백보드를 맞고 튕겨 나와 바닥에 굴렀다. 바닥을 튀다가 구석으로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쫓아가 주워 드는 김기정의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김기정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사랑이라는 건 뭘까?”
“뭔, 씹…. 뭐?”
“대체 뭐길래, 세계가 멸망해도 좋다고 하는 걸까.”
“갑자기 뭔 소리야?”
느닷없는 김기정의 질문에 황보석은 선빵으로 날리려던 질문을 모조리 까먹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김기정은 바닥에 공을 다시 튕겼다가 잡기를 반복했다. 황당함을 금치 못한 황보석이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무어라고 소리치려는 순간 김기정이 그의 흐름을 끊는다. 황보석.
“만약에, 한 사람의 목숨값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떡할래?”
“…야, 김기정.”
“나는 네가 했던 선택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게 너니까.”
황보석은 며칠간 김기정과 말도 섞지 않았다. 그때 김기정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안 떠나가…서는 아니고. 그냥 좀 비위가 상해서 그랬다. 무맥락 뜬금포로 허튼소리 던지는 것도, 체육관 들어서자마자 농구공부터 튕기는 것도, 너무 그 녀석과 똑같아서. 김기정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부글부글, 두개골이 찌이잉, 맥박이 울렁울렁.
∞
어느 날 황보석은 생활기록부 한 줄이라도 더 채우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썩을, 이딴 허접한 독후감으로 생기부 채우는 게 무슨 도움씩이나 된다고. 그래도 담임의 권유에다 대고 귀찮으니 싫다고 뻗댈 수도 없었으니, 황보석은 얌전히 쉬는 시간 혹은 점심시간에 얌전히 도서관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어렵기만 한 고전 문학, 관심도 없는 이들의 자서전이나 에세이, 아니면 경영, 아니면 코딩, 아니면 사학. 빼곡한 책장을 아무리 돌아다녀봤자 구미가 당기는 책은 없고, 펼쳤다간 구역질만 나올 것 같은 책뿐이다. 남들은 뭘 읽었나 좀 볼까 싶어 다가간 북 트럭에 쌓인 책도 열 권이 채 되질 않는다. 얘들아 책 좀 읽어라, 책 좀. 책더미라고 하기도 우스운 책들의 제목을 찬찬히 훑던 중, 황보석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유일하게 사랑하지 않은 세계>
[세계의 존망이 사랑에 달려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세계의 종말이 카운트되는 트리거가 당겨진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4백 번 하고도 열세 번의 차원을 건너서, 종말을 마주하지 않은 세계를 찾아낸 이의 결말은?]
책 뒤표지에 적힌 개요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누군가는 그저 흥미로운 SF소설이라며 흘끔 보고 넘어갔겠지만, 황보석은 어쩐지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종말을 향한 트리거가 당겨질 때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사랑을 저버리면서까지 몸부림치는 차원 여행자의 이야기. 휑한 북트럭 앞에 서서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 홀린 듯이 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종이 울리는 순간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리곤, 그제야 부랴부랴 대출 신청을 하고 교실로 뛰어갔다.
‘너랑 내가 사랑에 빠지면 세상이 망한다는 걸 알아. 그래도 네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너랑 다시 사랑에 빠지면, 그럼 우린 또 헤어져야 하는 걸까. 이미 트리거는 당겨졌어. 그 말은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야.’
∞
김기정이 전학을 온 후부터 졸업식까지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린 탓에 뭘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특히나 황보석은 수능을 포함한 입시 준비에 허덕이느라 더 그랬다. 김기정의 여유로운 표정을 마주칠 때마다 황보석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모른 체 하기에 바빴다. 미술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그래서 전학 온 후로도 얼굴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었나 싶기도 했다. 그를 반쯤 모르는 사람 보듯 대하던 황보석에게는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진짜로. 반호진이나 김예온의 성공적인 입시에 잇따라 황보석도 원하던 학교 합격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농구부 후배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그들의 역할을 넘겨받았고 3학년의 정식적인 퇴부를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졸업식 날은 날씨가 영하까지 내려갈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패딩에 목도리까지 꽁꽁 싸맨 채로 체육관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게 퍽 우스웠다. 하나둘씩 이름이 불리면 단상으로 나가 졸업장을 받았고, 1년에 한 번 부를까 말까 하는 교가를 불렀고, 졸업을 축하한다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체육관에 모인 학생들은 한날한시에 졸업생 신분을 얻었다.
“황보석.”
득시글한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비집고 김기정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제가 신경을 안 쓰면 덩달아 모르는 체하던 놈인데 어쩐 일로 저를 부르나, 싶었던 황보석은 발걸음을 옮겨 김기정에게 다가갔다. 체육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인파를 거슬러 들어가자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바람에 황보석은 인상을 팍 구겼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마주한 김기정은 새하얀 꽃다발을 든 채 여전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물어본 적 있지? 한 사람의 목숨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얼마 전에?”
“아니, 한…. 초가을쯤?”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김기정의 말에 따라 기억을 더듬던 황보석은 당황한 표정을 했다. 학생인지 학부모인지 모를 인간들은 역으로 파도를 거슬렀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선 게, 꼭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붕 뜨는 것 같고,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발이 저릿한 게 추워서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는 이 기분. 김기정이 든 꽃다발이 파르르 떨린다. 흰 튤립과 안개꽃. 김기정은 잠시 꽃다발 위로 고개를 숙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입을 연다.
“지금은 어때. 그때랑 같아?”
“아니 뭔…. 제대로 설명을 해. 뭐하자는 거야, 이게.”
“하하하. 석아, 사랑이라는 건 너무 큰 책임을 지게끔 하는 것 같다.”
“뭐?”
하이씨, 이런 바보가 뭐가 좋다고 진짜. 김기정의 웃음소리에는 허탈함과 안도감, 그리고 이런저런 감정이 마구 뒤섞여있는 것처럼 들렸다. 목소리가 떨려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웃음을 짓는 김기정의 인영이 일렁이는 듯 보여서, 황보석은 다급하게 김기정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얼굴로 또 훌렁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네 선택이 변하지 않았길 빈다. 이건 선물.”
김기정이 품에 안은 것들을 몽땅 황보석에게 넘긴다. 꽃다발, 졸업앨범, 하물며 졸업장까지. 흰 튤립의 향이 냉큼 콧속으로 들이닥친다. 품 안으로 쏟아지는 물건에 황보석은 야이씨, 작게 읊조리며 허둥지둥 팔에 들린 물건을 정리했다. 김기정은 키득이는 웃음을 흘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보석이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쑥 빼간다. 보답은 이걸로 받을게. 먼저 간다. 황보석의 어깨를 툭툭 친 김기정은 인파 속으로 스며든다. 크고 작은 머리통들이 김기정을 가렸다가 말았다가, 이내 한참 멀어져서 2미터 조금 안 되는 키로도 찾을 수가 없다.
“야, 김기정!”
김기정을 따라잡으려다 발치에 걸리는 앨범 두 개에 휘청인 황보석은 자리에 멈춰서 한숨을 푹 내쉰다. 아니 뭐, 어쩌라고? 뭔데? 주섬주섬 짐 주워 들고, 이마에다 나 짜증 났다 써 붙인 모양으로 인상 한껏 구긴 채로 짐 한 아름 들고나온 황보석은 저를 기다렸던 친구들을 발견했다.
“뭐야, 김기정은?”
황보석이 짐 더미를 정리하는 동안 반호진과 김예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황보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김기정 너네랑 있는 거 아니었어? 이 새끼 아까 나한테 짐 던져놓고…. 흘러내린 가방 고쳐 매고, 무거운 졸업앨범 잘 고쳐 쥐고, 다른 한 손에 꽃다발 두 개 안으니 손이 꽉 찬다. 이상한 얼굴의 친구들을 한 번씩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우뚱, 눈썹을 으쓱. 뭔데, 라며 다시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상하다.
“…왜 그래, 석아. 갑자기 기정이 얘기가 왜 나와.”
“뭔 소리야?”
“김기정, 저번 가을에….”
죽었잖아.
∞
황보석은 무사히 대학교 신입생 타이틀을 달았다. 졸업식 날에 생겼던 알 수 없는 사건은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흐려졌다. 가끔 떠오르는 날엔 속이 울렁거려서 기분이 안 좋았지만, 꿈이라도 꿨나보다, 하며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신입생 설명회 가서는 놓쳤다가 애먹는 것 없이 눈 부릅뜨고 설명 들었고, 수강 신청 날에는 친구들과 피시방에 모여 다리 달달 떨다가 성공했니 말았니 소리를 질렀다. 신입생 환영회 때는 선배들이 신입생을 그렇게 예뻐하시는 줄 몰랐는지, 주는 대로 다 받아먹다가 집에 네발로 기어들어 갔다. 이제 막 시작한 대학교 1학년 생활을 즐기기 시작할 때쯤이면 쏟아지는 과제와 함께 벚꽃이 만개하곤 한다.
“벚꽃 많이 폈네.”
“…김기정?”
분명 그가 아는 인영이었다. 삐죽빼죽 세운 머리에 축 늘어진 백팩, 옷 입는 꼬락서니 하며, 익숙한 디자인의 운동화까지. 황보석은 홀린 듯이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나지막이 소리 내 말한 이름에, 벚꽃 아래 선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황보석을 돌아보았다.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은 황보석이 질리도록 보고, 질리도록 그리워했던 얼굴이었다. 신이시여. 놀라기는 황보석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석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김기정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추운 봄바람이 목덜미를 쉬익 스쳐 가서, 김기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이 뿌연 게 먼지 섞인 바람 탓인지, 아니면 정수리까지 뜨거워진 얼굴 탓인지, 아니면 코끝이 찡할 만큼 아프게 덮쳐오는 감정 탓인지 알 수 없었다. 황보석은 부들거리는 입꼬리 애써 끌어올리는 김기정의 얼굴을 빤히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하하하…. 석아….”
“제발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만약에, 누군가가 죽어야 세계를 구할 수 있어. 그럼 너는 어떻게 할래?”
“내가 여기서, 다른 답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
“……제발.”
김기정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고 벌게지는 눈에 눈물이 차서 눈동자가 일렁였다. 제발 그래 달라는 건지, 그러지 말아 달라는 건지. 괴로운 얼굴이다. 김기정은 종종, 아니 자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알 수 없는 흐름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들은 황보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의중을 반이나 이해하면 많이 이해한 거였다. 그리고 황보석은 그런 김기정을 굳이 이해하려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김기정이 그런 줄 알라면 굳이 태클 걸면서도 그런 줄 알겠다고 하던 놈.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김기정이 저런 얼굴을 하는데, 멀뚱히 눈만 끔뻑이고 있는 게 맞나? 내가 내 입으로, 김기정에게 죽어달라고 말하는 게 맞느냐고. 어쩌면 이번에 트리거를 당긴 사람은 김기정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르겠다고, 황보석은 생각했다. 땅이 꺼지라 한숨 깊게 내쉬고 황보석은 입을 연다.
“김기정.”
“…….”
“만약에 내가 죽어야만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그러면 너는 꼭. 세계를 택해라.”
“석아….”
“그걸 위해서 몇 번이나 여기에 온 거잖아.”
세계를 구할래? 아니면…. 네가 겪었던 종말을 나에게도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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